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31)- '증권공동 온라인 가동'

컴퓨터 도입과 함께 몰아온 전산화의 물결은 금융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증권업계는 업무 특성상 정보의 신속한 전달과 의사결정의 적시성, 고객요구의 다양성 및 정보자료의 대량성이 기본인 만큼 경쟁전략의 일환으로 증권업무 전산화에 앞장섰다.

증권업무가 전산화를 시작한 것은 74년. 증권거래소가 처음으로 주식매매업무, 수도결제업무, 홍보업무 등을 전산화하면서부터였다. 당시만 해도 증권거래소가 29개 증권사를 대신해 투자고객으로부터 수탁받은 매매주문을 증권사 이름으로 매매체결하는 업무를 비롯해서 정산업무, 수도결제업무 및 조사통계업무, 감리업무 등 일련의 업무를 전부 맡아서 처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초기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전산실 메인컴퓨터인 CYBER 72와 리모트 배치터미널을 증권거래소 내에 설치, 연결해 업무를 처리하다가 76년 IBM의 SYSTEM 3을 자체 도입해 증권거래소는 물론 증권업계 공동의 활용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각 증권사들의 업무가 공통적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개발은 인력과 재원 낭비라는 판단에서 증권계 공동 전산업무를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토록 재무부의 시책이 내려진다. 그러나 증권인구가 증가하고 경기 활성화에 따른 업무량 폭증으로 증권거래소 단독으로는 모든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가 역부족인 상황에 이르게 됐다.

이에따라 76년말 증권업협회는 증권기관 전산업무 공동이용체인 증권전산전업회사를 설립할 것을 의결하고, 77년 9월 증권거래소가 1억원을 출자해 한국증권전산주식회사가 탄생한다. 결국 1983년 2월 증권공동온라인(매매주문, 체결)을 개통함으로써 증권전산화는 새로운 서막을 열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증권공동온라인시스템'은 1981년 3월 증권창구 사고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고, 대고객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서울·인천·부산·대전·대구·광주 등 6개 도시에 있는 증권 관련사의 본지점과 증권거래소 입회장 터미널을 연결하는 전국적인 공동 온라인 네트워크를 구성, 한국증권전산이 보유하고 있던 대형컴퓨터를 중앙처리장치로 공동이용하려는 증권공동온라인시스템은 당초 가동 일자는 82년 9월로 계획된다. 즉 82년 7월부터 8월말까지 시험 가동 기간을 거쳐 9월 1일부터 정상 운영한다는 방침하에 연간 5백여명을 투입, 시스템 개발에 들어갔다. 그러나 실제 가동은 5개월 늦어진 83년 2월에서야 가능했다. 정부의 국산컴퓨터 활용 방침에 따라 일부 단말기에 한해 국산대체를 권고받으면서 증권공동온라인 가동이 차질을 빚은 것이다.

증권전산은 81년 10월 국내 27개 증권회사의 공동온라인용으로 과기처에 메인컴퓨터(유니백 1000/62)와 단말기 3백67대를 도입 요청했다. 결과 3백7대의 단말기 유니백(UTS 20H) 도입은 승인받았지만, 단말기 60대는 국산으로 대체한다는 조건이 뒤따랐다.

이에따라 82년 4월 27일 증권전산은 국내 12개 단말기 메이커에 국산 단말기 납품 제안요청서를 보냈고, 5월 7일 6개 메이커만이 참석한 가운데 제안 요청 설명회를 가졌다. 그러나 6월 24일 공급을 제안한 회사는 단말기 국산 등록업체가 아닌 스페리 유니백뿐이었고, 나머지 국내 단말기 메이커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차질이 빚어진 것이다.

당시 국내 메이커들의 이같은 반응은 증권공동온라인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가진 인텔리전트 터미널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메인컴퓨터와의 접속을 위한 프로토콜이나 인터페이스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해야 했던 때문이다. 하지만 60대 소량 생산을 위해 투자한다는 것이 채산성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증권전산업무는 모든 매매주문이 서울에 있는 증권거래소 매매입회장으로 전달돼야 하기 때문에 지방 점포에 단말기를 설치해서 매매주문을 온라인 처리해야 한다. 따라서 60대의 지방설치용 단말기가 제때 공급되지 않을 경우 서울지역은 전산 온라인화, 지방은 수작업 처리에 따른 증권업무 이중 병행처리로 인한 혼란이 불가피했다.  결국 이 때문에 증권전산은 83년 2월 본격 시스템 가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주식매매등 증권사의 일상업무가 전산화로 즉시 처리된 것은 물론이고, 유가증권의 관리 통계자료를 자동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또 고객의 원장과 통장이 모두 회수, 폐기되는 등 무통장, 무원장 시대를 개막하는 일대 전환을 맞게 된다. 개발비 3억원, 초기 운영자금 30억원의 결실이었다.

당시 증권공동온라인 개발은 장태완 증권전산 사장 취임이 큰 역할을 했다. 장태완은 잘 알려진 대로 12.12 사태때 군부 쿠데타를 저지하려 했던 몇 안되는 인물. 그런 인물이 공공기관의 성격이 강한 증권전산에 오게 된 것이 의외였지만, 어쨌든 장 사장이 온 이후 증권전산의 전 증권사 통합 온라인 개발은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물론 증권거래소가 대주주로 있던 증권전산이 힘을 키우게 된 것도 장 사장이 취임한 이후부터였다.

이 시절 전 증권사 온라인 업무 개발은 증권업무 표준화 및 중앙집중관리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고 있었다. 공동온라인으로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증권업무 전산화의 모델이 됐는데, 일본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참여한 쿠웨이트 증권거래소 온라인 개발 입찰을 수주한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였다. 쿠웨이트 증권거래소 프로젝트는 하드웨어는 쿠웨이트 알바흐사가 설계하고, 기술은 영국 쿠퍼스앤라이브러리가, 소프트웨어 개발은 한국증권전산이 맡아 추진하는 것으로 계약이 추진됐다.

한편 출발하던 시기부터 삐걱거렸던 증권공동온라인은 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반발이 극에 달한다. 증권업무의 독점관리에 따른 위험성을 비롯, 한국증권전산의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자생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증권전산과 증권사들은 그간 수차례에 걸쳐 고객의 주식거래 원장등 증권전산 관계 기초자료 공유문제와 관련된 협의를 가졌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터였다. 결국 25개 증권사 가운데 빅5라 불리던 대형증권사인 대우, 대신, 동서, 럭키, 쌍용투자증권은 대고객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증권전산의 공동온라인시스템에서 탈퇴해 개별적인 독자시스템을 갖추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한국증권전산은 증권업무 전산화를 추진하면서 업무량 증가에 대한 예측을 잘못함으로써 문제의 소지를 발아시켜 왔다. 그것도 소위 3저시대를 맞아 경기가 호황이던 주식시장이 물량면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89년부터 시스템 다운이 잦아져 증권사들의 불만은 극으로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이에따라 '시스템2000'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전산센터를 구축하는 한편 증권전산의 고객 계좌원장 이전은 95년 7월을 기해 20% 내에서 희망 증권사에 한해 시행하고, 차후 단계적으로 이관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증권업계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83년 증권공동온라인은 잇딴 증권사들의 탈퇴로 역사의 현장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시스템 다운같은 장애 발생으로 업무에 혼선이 초래된 것은 사실이지만 초창기 증권 업무 활성화에 기여한 주역이 퇴물화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과거가 있기에 현재와 미래가 있는 법. 과거의 증권공동온라인시스템이 각 증권사들의 증권시스템 독자 가동에 기반 기술을 제공했던 것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진설명: 장태완 전 한국증권 사장, 12.12 쿠데타를 저지하려 했던 장태완 장군은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 군에서 퇴임했고, 이후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취임하고 증권공동온라인망 개발을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