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37)- '국내 첫 워드프로세서 '명필' 개발 '

70년대 금융권에서 시작된 사무자동화(OA)는 80년대 들어 전 산업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사무자동화는 기존의 사무기기에 컴퓨터의 기억 능력과 제어기능을 더한 것으로, 경영 합리화 차원에서 컴퓨터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이런 OA의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 워드프로세서였다. 도형이나 문자를 포함한 모든 자료를 마음대로 편집하고 처리할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는 80년대 기업과 가정을 풍미하면서 컴퓨터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국내 첫 상용 워드프로세서는 1983년 8월 고려씨스템이 개발한 '명필'이다. 명필은 정확히 말하면 8비트 마이크로 컴퓨터와 CRT 터미널등 하드웨어와 문서편집용 소프트웨어가 일체화된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다. 지금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하드웨어 독립적인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금성소프트웨어(현 LG LCD)가 행정전산망 PC용으로 내놓은 '하나'가 개발된 1987년. 이 때까지는 명필을 비롯한 워드프로세서 전용기가 풍미했다는 얘기다.

명필은 원래 과학기술처가 특정 연구과제로 추진한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개발' 프로젝트를 KAIST 전산개발센터에서 위탁과제로 수행, 개발한 것이다. 고려씨스템이 공동개발자로 돼 있기는 하지만 실제 고려씨스템은 상품화에 주력했다. 개발 주역은 당시 전산개발센터 제1그룹장이던 이기식(대우증권 부사장)을 비롯해 정왕호(인터테크 이사), 박동인(ETRI 부장) 등이었다.

명필의 발단은 79년 KAIST가 '정보산업 토착화를 위한 소프트웨어 이전 체제 개발연구'라는 출연 연구과제를 수행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일로그의 8비트 Z-80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의 컴퓨터에 한글이 지원되는 CRT 터미널과 라인프린터를 연결해서 한글 워드프로세싱을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 결과 탄생한 것이 '워드80'이었다.

미니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 전용기의 세계적인 공급사였던 미국 왕래버러토리즈의 지원하에 80년 10월 미국문화원에서 발표된 워드80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얻었지만, 시스템 구성방식이 까다롭고 고가여서 상용화에는 부정적인 시각이 높았다. 가격만도 당시 웬만한 소형 아파트 한 채 값이었던 만큼 일반화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같이 워드80이 한계에 이르자 81년 KAIST는 민간지원금을 끌어들여 워드80을 개량한 워드프로세서 전용기 '워드88'을 내놓게 된다. 여기서 자금을 지원한 곳이 고려씨스템산업이다. 하지만 워드88은 당초 기대와는 달리 기존 워드80의 단점을 극복하지 못해 주목받는데 실패한다. 이에따라 한글과 한자, 영문을 자유자재로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명필이다. 워드88의 개발경험에 소프트웨어 기능을 향상시키고, 전용 하드웨어를 새로 개발해서 일체화시킨 것이다. 이를 주도한 이가 정왕호로, KAIST 전산개발센터 성기수 소장까지 끌어들여 83년 과기처의 특정 연구과제로 성사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 전용기의 개발 목표인 보급형이라는 조건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였다. 보급형이란, 일단은 저렴한 가격인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83년 당시 Z-80을 탑재한 국산 마이크로 컴퓨터 가격이 자동차 한 대값에 필적하는 7백만원 이상이었다. 새로운 워드프로세서도 좋지만 하드웨어 가격만 7백만원에 달하는 제품이 보급형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결국 방편을 모색한 끝에 생산 단가를 최소화하기 위해 수출용 CRT를 사용하고, 본체는 생산 중단된 금전등록기의 금형을 변형시켜 둘러씌웠다. 겉으로는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국내 최초의 메뉴 중심 모델이었고, 편집이 가능한 워드프로세서였다는 점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대단했다. 가격 역시 프린터를 제외하고 2백61만원으로 적정 보급형 단가를 맞추는데 성공했다. 명필의 첫 고객은 청와대 비서실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명필은 이후 KAIST에 의해 84년 한자 처리기능이 추가된 명필II로 업그레이되고, 86년에는 명필IV까지 개발된다. 또 87년 명필 하드웨어를 인텔 80286 기반의 IBM 호환PC용으로 이식했고, 이를 계기로 스프레드시트와 그래픽 기능을 함께 구현할 수 있는 '슈퍼 명필'까지 개발했으나 빛을 보는데는 실패했다.

한편 명필이 개발된 무렵인 83년 국내에는 영문 워드프로세서의 대명사인 미국 '워드스타'가 소수 전문가들 사이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국산으로는 큐닉스가 '으뜸글'이라는 비교적 다기능화된 워드프로세서를 자체 개발해 판매하고 있었다. 하지만 으뜸글은 워드스타처럼 문장 중간에 명령어를 입력하는 방식이어서 메뉴 선택 방식의 명필과는 달리 상당기간 교육이 필요한 전문가용이라는 한계가 도출됐다.

이외 삼성전관은 KAIST 시스템연구실 김길창 박사 연구팀에 의해 기존 소형 컴퓨터에 워드프로세서 기능을 개발, 데이터 처리와 워드프로세서를 동시에 수행하는 기기를 내놓았다. 삼성전자 역시 기존 오피스 컴퓨터에 워드프로세싱 모듈을 연결해 워드 프로세서의 기능을 동시에 응용할 수 있는 '글벗'이란 소프트에어를 개발, 워드프로세서 기종을 내놓았다. Z-80 CPU 및 표준 CP/M 또는 MP/M을 사용하고 터미널은 ST-207H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로써 80년대 초반 고려씨스템을 포함한 큐닉스, 삼성전관, 삼성전자, 조우니, 컴퓨터 코리아 등이 한글 워드 프로세서 기기를 잇따라 발표하는 등 워드 프로세서 춘추전국 시대를 향한 기반을 다져 나간다. 이들 워드 프로세서가 일반 대중에 컴퓨터 마인드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물론 MS워드와 아래아한글, 인터넷 기반의 다양한 오피스들이 등장하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무모한 도전일수도 있지만, 당시 오피스는 단순한 사무용 SW가 아니라, 전국민의 컴퓨터 마인드, 정보화 마인드를 촉진시킨 촉매제 구실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진설명: 1985년 당시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두고 업체간 경쟁이 치열하다는 기사(매일경제, 1985년 4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