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41)- ' 국정보통신기술의 금자탑 TDX 개발'

TDX 전자교환기는 우리나라 기술개발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TDX 전자교환기는 정보통신 기술에 대한 우리의 자신감을 한껏 우뚝세웠다.

당시 전세계적으로는 60년대 초부터 지속돼온 통신기술과 컴퓨터 기술이 결합되는 전초단계로 디지털 기술이 통신기기, 특히 교환기기에 이용되기 시작한다. 70년대에 들어오면서는 디지털 교환기술을 이용한 전전자 교환기 개발로 컴퓨터와 통신의 완전결합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세계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전전자교환기란 컴퓨터가 전화의 교환기능을 자동으로 수행하는 시스템으로, 전자 교환만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 용도의 컴퓨터를 말한다. 기본시스템이 대부분 디지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디지털 교환기(Digital Switching System)라고도 한다. 전화는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생활용품으로 발전이 당연시됐던 만큼 전전자교환기는 향후 통신환경에 대단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예견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통신기술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핵심과제로 변화하는 통신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정보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제기되던 당시, 전전자 교환기의 자체 개발은 중요한 것으로 다가왔다.

70년대 후반, 당시 국내 환경에서도 전자식 교환기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던 시기였다. 고부가가치 기술집약형으로의 산업구조 고도화나 다채로운 전기통신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요구는 둘째로 하더라도, 당장 누적된 전화적체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기계식 교환기를 전자식으로 바꾸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76년 2월 제7차 경제장관간담회에서 국산 전전자교환기를 개발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의 발족과 함께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됐다. 이후 TDX-1 국산화는 기술입국을 실현하기 위한 첨단기술 과제로서 제5차 5개년 계획기간중 정부로부터 연구개발자금 2백42억원을 지원받아 본격적인 개발사업에 착수하게 된다.

정부는 제품 상용화를 위해 80년 10월 해외 생산업체와 기술협력 관계를 갖고 국내 금성반도체,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 삼성반도체통신 4개사에서 교환기를 생산토록 결정했다. 당시 4개 업체로 국한한 것은 논란의 여지를 낳았는데, 이는 집중지원에 의한 기술력 향상으로 국산화율 제고란 측면과 자유경쟁에 의한 저가격 고품질 제품의 제공이란 측면에서였다.

실질적인 TDX-1 개발은 82년부터였다. 이전에 개발된 TDX-1X에 대한 시험운용 및 보완, TDX-1 개발 등이 숨가쁘게 진행됐다. 하지만 83년 2월 한국전기통신연구소가 대덕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핵심 개발요원이던 여재홍과 강진구가 프로젝트에서 빠지고 핵심 요원은 박항구만 남게 됐다. 10여년간 쌓아온 전자교환기 개발 체계가 와해되는 순간이었다.

끝없는 회의는 계속됐다. 그런데 그 유명한 TDX-1 개발의 중요한 의사결정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결정되는 어처구니없는 과정도 연출됐으니, 어차피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분석되고 분할돼 있지 않아 분야간 연결이나 인터페이스는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우기거나 책임을 회피하면 된다는 생각이 기반돼 있었던 때문이다.

이렇게 공전하던 TDX-1은 TDX 사업단이 설치되면서 제자리를 찾으며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84년 1월 한국전기통신공사는 TDX 사업단을 설치하고 서정욱(과기처 장관) 박사를 단장에 임명한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TDX-1 상용화를 위해 개발업무를 종합 관리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런 외적인 당연한 목적 이외에 표류하고 있던 TDX-1 개발을 정상화하려는 것이 보다 강력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체신부는 84년 4월 25일 상오 10시 30분 서대전 전신전화국에서 김성진 체신부 장관을 비롯해 오명 체신부 차관, 이우재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 백영학 한국전기통신연구소장과 통신산업 관련인이 참석한 가운데 국내 개발 전전자 교환기 시범 인증기 개통식을 갖기에 이른다. 첫 실용시험은 농어촌 국설 교환기로써 설계용량 8천회선. 서대전 전화국과 유성분국에 설치된 2대의 TDX-1 교환기는 전기통신연구소에 설치된 집중보전 시스템으로 유지보수하기 위해 망이 구성돼 있었다.

가슴을 졸이던 84년 농어촌용 TDX-1 개발이 성공함에 따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0번째 TDX 개발국이 된 것은 물론 이후 TDX-1은 날개를 돋치고 성장가도의 길에 들어선다. 85년 가평, 전곡, 무주, 고령 4개 전화국에 공급한 것을 시작으로 기계식 교환기를 대체하기 시작한데 이어 2만2천회선 용량의 TDX-1을 중소도시에 개통한다. 당시 관계자들은 'TDX-1 개발에는 ETRI 연구원 2백40명과 기업체 연구원 40여명이 참가, 5년간 연구한 끝에 실용화시킨 것으로 당시 이들의 감격이란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91년 개발된 TDX-10은 10만회선 용량을 갖고 있는 가장 진보된 전전자교환기로 한국통신 주관하에 금성정보통신, 동양정보통신, 삼성전자 등 교환기 업체가 공동 작업한 성과물이었다. 투입된 개발비는 1천2백34억원(한국통신 출연금 5백60억원, 기업 출자금 6백74억원). TDX-10은 대용량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 이외 미래 종합정보통신망이나 지능망에 대비해 CCITT에서 규정한 ISDN 베이직 액세스 처리기능을 갖춰 화상등 비음성 서비스에 대응할 수 있었다.

91년 상계 천호지구를 비롯해 북울산, 대구 수성지구, 대전지구에 6만2천회선을 개통하는데 성공한 TDX-10은 수출 주역으로도 급부상했다. 92년 12월 이란 3백50만달러, 베트남 1천5백36만달러, 필리핀 5백70만달러 등 총 9천5백60만달러에 상당하는 물량을 수출하는 쾌거를 기록한 것이다.

TDX는 통신과 컴퓨터, 반도체 기술이 총체적으로 융합돼야 하는 것으로 기술 국산화 비율이 90%를 상회하고 있다. 더욱이 소프트웨어 국산화 비율이 높고 모듈화돼 있어 수정이 필요한 경우 모듈만 수정하면 되기 때문에 시스템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원천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지보수가 용이한 것은 TDX의 중요한 결실이 아닐 수 없다. 특히 TDX-10은 전자사서함, 비디오텍스, 영상회의, 원격검침 서비스 등의 비음성 정보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ISDN이나 지능망 등의 수준높은 통신기술을 구현하는 밑거름이 되어 자력으로 통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TDX가 이같은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국산화를 결정한 시점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교체하는 시기에 적중해 외국기종으로부터 국내 시장을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TDX 개발에 대한 정부의 의지와 집중적인 투자들이 주효했고, 도입교환기를 설치 운영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 노하우와 더불어 품질보증개념 도입 및 엄격한 시험평가제를 실시한 것도 TDX가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다.

<사진> 1982년 실질적인 TDX 개발에 성공한 지 8년여가 지난 1990년에  200만회선 개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