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45)- 행정전산망 주전산기 '톨러런트'

1986년 5월 행정전산망 사업이 부문별로 구분되면서 주전산기 구비 조건이나 확보방안들이 마련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행망 전담기관인 한국데이타통신은 ETRI와 주전산기 개발 방안에 이견을 보인다. 데이콤은 88년까지 행정전산망의 1단계 사업 실시를 위해 외국 기술을 그대로 도입한 다음 점차 국내 기업들에 기술전수를 하겠다는 것이었던 반면 ETRI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국내에서 개발할 의지를 표명했다.

관련 부처와의 협상 결과 1단계 외국기종 도입, 2단계 독자적인 시스템 개발이라는 형태로 주전산기 개발 형태가 결정된다. 이로써 ETRI는 주전산기 개발을 맡고, 데이콤은 소프트웨어 부문 개발을 책임지는 것으로 업무구분이 일단락됐다. 당시 행정전산망 사업 계획에 따르면 필요한 총 38대 시스템의 주전산기 가운데 외국에서 5대를 도입하고 나머지는 금성 등 4개 참여업체와 전자통신연구소가 공동으로 개발, 타이거라는 이름으로 보급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에따라 1986년 12월 주전산기 기종은 톨러런트로 결정되고, 행정망 사업은 본격적인 궤도로 들어간다. 그러나 행정전산망 주전산기로 채택된 톨러런트의 이터너티시스템이 서비스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서 행정전산망 사업은 또다른 불신을 야기시켰다. 파란만장한 행정전산망 사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1988년 1월부터 행정전산망 7개 우선추진과제중 하나로 서비스를 실시하던 국민연금 업무가 연일 계속되는 시스템 다운에 서비스를 제대로 실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연금공단에서는 문제의 원인이 주전산기로 사용되고 있는 톨러런트 시스템에 있는 것으로 보고 한국데이타통신에 협조공문을 띄워 해결방안을 모색토록 했다.

보사부가 1988년 5월 행정망추진위에 제출한 '국민연금 전산현황 보고서'에는 △88년 1월 각출료 고지서에 87년 12월 연금 가입자 증서의 중복 및 착오가 90만명이 발생했으며 △2월 각출료 고지서에는 10만명이 누락되고 △4월 30만건 오류자료가 존재하고 있어 2~3개월이 지나면 연금업무 정상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됐다. 톨러런트 시스템은 이론상 32대까지 연결해 확장시킬 수 있었으나 실제 업무에서 연결해 본 결과 문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1988년 1월부터 4월까지 국민연금 주전산기의 고장횟수가 1백34건에 달해 사태의 심각성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큰 요인은 이터너티 시스템의 운영체제인 TX와 하드웨어의 불안정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톨러런트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13명의 엔지니어를 급파했고 국내 연구인력 19명이 안정화 작업에 참여하며 진화에 나선다.

톨러런트는 단순히 시스템 도입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국내 기간전산망을 담당하는 중핵일뿐 아니라 기술 도입을 통한 중대형 시스템의 국산화라는 거시적인 차원과 맥을 잇고 있었던 만큼 행정망용 주전산기에 대한 사안은 정보산업계 종사자들의 최대 관심중 하나였다. 톨러런트사에 대한 전산업계의 불신과 기종선정과정을 둘러싼 끊임없는 구설수로 한때 도입중지까지 거론되는 가운데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오늘의 국내 정보산업과 직접적인 맥이라는 점에서 상처는 크게 남아 있다.

당시 톨러런트 시스템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던 유닉스 머신으로, 톨러런트사는 유닉스를 자사의 고유 OS인 TX로 바꾼 최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벤처기업인 톨러런트의 OS 기능을 확신할 수 없었을뿐 아니라, 국내에서 필요한 전산기는 최신 기술보다는 국내 행정 업무에 적합한 시스템이어야 한다는 논쟁 속에서 이터너티 기종이 선정된다. 기종을 선정한 데이콤은 행정전산망과 함께 슈퍼미니급 국산화로 정보산업계에 획기적인 발전 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두 마리 토끼 사냥을 노렸던 것이다.

사실 데이콤은 톨러런트 시스템의 안정성보다는 이후 국산화를 위한 기술이전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이미 안정된 시스템의 컴퓨터도 많이 있으나 최신 시스템인 경우는 기술이전에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기종선정에 대해 공식적인 거론이 나온 것은 87년 4월 실시된 한국전산원의 행정망 사업 1차 감리결과가 나오면서부터였다. 당시 전산원이 실시한 감리결과에는 '유닉스는 소스프로그램 공개라는 점에 국산화 차원에는 바람직하나 행정전산망 사업을 위하여는 자료 보안기능의 추가 강화가 요망되는 것으로 사료된다. 본 건은 공식적인 기종 제안 요청 절차를 중요시하지 않음으로써 각 기종들의 가격과 성능에 대한 공신력이 부족하다고 사료된다. 또한 기종 선택과정과 평가 비중에 대한 근거 등의 합리성이 부족하다고 사료된다'고 함으로써 데이콤의 사업방향에 대해 정면으로 제동을 걸었다.

당시 톨러런트와 관련된 의문들은 많았다. 1986년 초 주전산기 기종은 엔마세로 대세가 기울어가고 있었고, 기타 제3의 기종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에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데이콤 관계자들은 유니포럼 회의에 참석, 톨러런트사와 상견례를 갖는다. 몇 년간의 실속없는 개발 투자로 심각한 자금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톨러런트사는 다른 어느 업체보다 활발한 로비활동을 벌이고, 유니포럼 이후 톨러런트와 데이콤 관계는 급진전됐다.

이에 대해 KAIST 전길남 박사는 톨러런트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다. 이것이 1986년 8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콤 최종회의에서 톨러런트로 결정되고, 더욱이 대표이사와 전무의 결재없이 서류작성이 끝나 톨러런트 선정은 미궁 속으로 빠진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계약내용을 보면, 기술 도입계약이 톨러런트사의 요구조건을 거의 들어주고 실속없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한국 내에서만 영업이 가능하고, 개량기종은 생산 후 3년이 지나 북미지역을 제외한 세계 전역에 판매할 수 있게 돼 있다. 이같은 계약으로는 수출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 전문가들 주장이었다.

한편 슈퍼미니 컴퓨터 연구개발이 한창 진행중이던 87년 10월, 데이콤은 개발업체 및 미국 톨러런트사와 대형컴퓨터 합작사 추진을 골자로 한 '오로라 계획'을 수립한 것이 언론에 대서 특필된다.

행정망의 전담사업자로 되어 있는 데이콤이 컴퓨터 개발사업 참여라는 측면에서 관계자들은 놀라움과 함께 의아심을 감추지 못했다. 데이콤의 갑작스런 변신은 주전산기 도입과정에 대한 '불신의 늪'이라는 면에서 또 한번의 파란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데이콤은 공식 해명없이 문서 책임자 감봉이라는 형태로 내부 단속을 하고, 관련자들에게는 검토중이었을 뿐이라며 서둘러 매듭을 지었다. 당시 검토 내용은 대형컴퓨터를 국산화해 해외 컴퓨터 수출 및 영업을 위해 톨러런트사와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계획하고 있는 합작사 설립의 당사자가 행정망용 주전산기 공급업체인 미국의 톨러런트사이고, 데이콤이 안을 수립하고 있었다는데 대해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톨러런트 주전산기 선정은 뇌물 수수설이 나돌며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다. 어쨌든 데이콤은 자의든 타의든간에 톨러런트 선정 이후 모진 세파에 시달린다. 전임 사장인 이용태 사장은 정보문화센터로 자리를 옮기고, 행정개발사업 본부장이던 이동욱는 미국 유학길에, 데이콤 고문이던 전길남은 영국에 교환교수로 이 땅을 떠난다. 많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 자체가 깨지지 않고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힘을 줬던 것은 과정에 대한 반성이 있었고, 이를 책임질 부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톨러런트 시스템은 제5공화국 당시 정보산업계에서 가장 많은 구설수를 남긴 행정전산망 사업 중에서도 그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지난 시대 입에서 입으로만 회자되던 오모씨와 홍모씨, 정모씨, 이모씨, 이모씨로 일컬어지는 '정보산업계의 5인방'이 '오적(五賊)'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5공화국 기술관료들이 남긴 역작을 기폭제로 국내 정보산업에도 권위주의적이고 획일화된 5공화국의 잔재를 일소하고 새로운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가적인 사업의 결정과정, 국가적 규모의 제도개선 등이 밀실작업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자성이 톨러런트 시스템을 앞세워 구체화된 것이다.

국산 주전산기 개발은 후에 주전산기 II 계획의 일환으로 순수한 국산기술로 타이컴이라 명명하고 출발을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결국 상용화 단계에서 실패함으로써 국산 기술의 한계를 드러낸 대표적 사례로 회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