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22)- '첫 국산 디지털컴퓨터 세종 1호'
외산 컴퓨터 업체들이 입지를 확보하고 민간 소프트웨어 용역업체들이 하나둘 진용을 갖추어 나가면서 우리것을 만들려던 시도가 1972년부터 구체화돼 나타났다. 컴퓨터가 들어온지 5년만의 일이다. 물론 60년대 초반 한양대 이만영 교수의 진공관식 아날로그 계산기나 한글 라인프린터가 있었지만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국산 컴퓨터는 73년 2월 완성된 미니컴퓨터 '세종 1호'가 효시로 기록되고 있다.
세종 1호는 미국 데이터제너럴(DG)의 미니컴퓨터인 '노바01'을 개량해서 만든 국내 최초의 국산 디지털 컴퓨터로, KIST 방직기기실의 안병성 박사 연구팀에서 실시한 사설전자교환조직 개발 프로젝트에서 연유했다.
세종 1호는 첫 국산 컴퓨터인데다 개발 자체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72년 4월 청와대는 KIST 안병성에게 청와대 주요 기관간 전화통화 내용을 미국이나 외국 정보기관에서 도청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사설전자교환기(PABX)를 개발해 줄 것을 요청했다. 통화 도중이라도 우선권에 따라 상위권 통화자가 통신상태를 제어할 수 있게 하는 핫라인 기능은 필수적으로, 73년 3월까지 개발이 가능하다면 연구개발비조로 6천만원을 제공하겠다는 것이 당시 청와대측 의뢰 내용이었다. 그 때 쌀값이 일반미 80kg 한가마당 9천7백45원이었는데, 6천만원이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거금이었다. 더욱이 KIST는 연구비가 부족해 쩔쩔매던 때였으니 횡재한 것처럼 기뻤던 것은 당연했다.
청와대측 제안은 이후 세상을 떠뜰썩하게 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부수상의 극비 남북교환 방문에 이어 7·4 남북공동성명과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등 긴박하게 돌아갔던 정치상황에서 청와대와 중앙정보부간 초특급 핫라인 개설을 위해 PABX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2개월이 지나 KIST측은 청와대에서 요구한 PABX가 미국과 소련에서도 극히 일부 고급기관에서만 사용되는 시분할식 특수 목적용 교환기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제작기술은 최첨단에 속하는 것이어서 KIST측으로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집착과 욕심은 끝내 계약을 체결하고야 말았다. DEC의 PDP-11이나 DG의 노바 01과 같은 미니컴퓨터를 PABX 시스템 제어용으로 활용하면 청와대측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앞섰던 것이다.
이로써 '메모콜(Memo Call) 프로젝트'라는 암호명으로 추진된 세종 1호는 72년 6월부터 73년 3월까지 약 7개월간 진행된다. KIST측은 안병성 사업책임자 밑에 하드웨어 디지털 부문에 여재홍(당시 한화전자정보통신 전무), 아날로그 부문에 이주형(당시 삼성전자 전무), 소프트웨어 부문에 천유식(당시 ETRI 책임연구원)을 팀장으로 '전자교환 시스템팀'을 구성해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연구에 1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제어용 컴퓨터였다. 당연히 물망에 오른 것은 PDP 11과 노바 01. PDP 11은 세계 최초의 미니컴퓨터를 개발했던 DEC의 제품으로 미국에서 생산되고 있었고 노바 01은 DG의 제품으로 일본이 로얄티를 지불하며 생산하고 있었다. 지명도와 신뢰도면에선 PDP 11이 노바 01보다 한단계 위였으니, 카드를 펴보나마나 승부는 뻔한 것이었다. 반면 DG는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미니컴퓨터 업체여서 주력기종인 노바 판매가 부진해 재고가 상당량 쌓이는 실정이었다. 물론 노바 01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PDP 11은 인기가 좋아 주문에서 제품 인도까지 평균 4~5개월이 소요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촌각을 다투던 KIST는 가능한 최고로 빨리 들여와야 했던 상황. 결국 이런 다급함에서 KIST는 노바 01로 시스템 기종을 변경하고 도입계약을 체결했다. 생각은 적중해서 주문 1주일만에 노바 01 3대가 방식기기연구실에 설치됐다. 청와대의 주문이라면 PDP 8/E가 가능했겠지만 미국 정보기관에 정보가 유출할 것을 우려한 청와대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작업은 순풍을 단 돛배로 척척 진행됐다. 연구원들의 열성도 열성이었지만 한 대로도 충분한 컴퓨터를 3대나 구입해 놓고 만약을 대비했으니 일이 지연될래야 지연될 수가 없던 입장이었다. 간혹 고장이 날 때는 즉시 교체를 하고, 고장부품은 일본에 연락해서 비행기로 실어와 고쳐놓곤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사용된 노바 01이 시분할 처리 기능을 지원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데이터를 생성하는 중앙 스위치와 모뎀에 접속된 지방 스위치를 리얼타임으로 제어해줄 수 있는 기능이 내장된 하드웨어가 요구됐고, KIST측은 노바 01의 사양과 기능을 그대로 복제한 호환컴퓨터인 세종 1호를 개발하게 된다. 하지만 인텔에서 개발한 1KB짜리 DRAM을 메모리로 사용해 처리속도를 크게 개선시킨 것은 세종 1호가 건진 대어였다.
약 6개월의 연구끝에 완성된 사설교환기는 'K1T-CCSS'로 명명돼 청와대측에 선보인다. 240회선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돼 있었는데, 약간의 모디피케이션만 하면 480, 640회선까지 확장됐다. 제어를 맡았던 세종 1호는 기억용량이 12KW였는데, 실제 사용은 약 10KW 정도였다. 이중 4KW는 본 프로그램으로서 교환기능과 특수서비스, 시스템진단, 부수프로그램에 사용되고 나머지 6KW는 해석프로그램인 각종 테이블로 사용됐다. 본 프로그램보다 해석프로그램의 비가 큰 것은 이 시스템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같은 지역내뿐 아니라 타지역간 통화도 중요시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K1T-CCSS가 제공할 수 있었던 특징은 많았다. 첫째는 발신을 상대방 전화번호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부여된 개인번호로 하도록 돼 있고, 상위원이 하위권의 통화로를 차단할 수 있는 우선순위 방식이 특징이었다. 또 우선순위 상위권자의 불필요한 피호출을 방지하기 위해 최하위권은 최상위권을 부를 수 없고, 우선순위 최상위권자는 5개 지방 어니서나 최고 50명까지 한번에 불러 회의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발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신뢰성에 문제가 많다는 이유로 청와대는 당초 계약했던 6천만원을 지불할 수 없다는 입장을 통보했고, 대신 이 시스템을 민간기업에서 상용화할 수 있도록 허가권을 내주는 것으로 의견이 조정됐다.
기계식 교환기에만 열을 올리던 당시 한차원 높은 전자교환기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이 있을리는 만무한 상황. 이런 와중에 GTE가 상품화를 선언하고 나선다. 면밀한 조사를 통해 상품가치를 인정한 GTE는 공동개발을 요구했고, 이렇게 해서 KIST는 50만달러의 연구비를 받고 K1T-CCSS 상용화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77년 2월 삼성그룹과 GTE가 삼성GTE(삼성반도체통신의 전신, 89년 삼성전자로 흡수)라는 합작사를 설립하면서 KIST의 K1T-CCSS는 GTK 500으로 명칭이 바뀌고 다시 CENTINEL 500으로 개명되면서 상당수가 판매됐다. 이후 삼성반도체통신은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1 개발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세종 1호 역시 삼성반도체통신이 독자적인 모델로 개발한 SSM시리즈 슈퍼마이크로 컴퓨터의 기술적 토대가 됐다.
한편 세종 1호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국산컴퓨터 1호가 탄생되는 극적인 순간 연구원들은 PABX 개발에만 열중하고 환호성 한번 치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 코가 조금만 높거나 낮았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역사가의 말처럼 세종 1호기가 탄생되 는 순간 연구원들이 환호의 일성을 지르거나 관심 한번 가져 주었더라면 국내 PC 판도는 현저하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물론 당시 사정이 좋지 았았던 것이 사실이다. 세종 1호기를 자료처리가 가능한 실질적인 컴퓨터로 개발, 꾸준히 발전시킬 만한 예산이 없었던 데다 발전의 촉매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전문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린 점은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