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23)- '삼성과 금성의 라이벌 열전'
외산업체와 국내 대리점, 소프트웨어 용역개발 업체 위주의 컴퓨터 산업계에 국내 대기업이 진출해 한판승부를 예고한 것은 1976년. 당시 삼성전자나 금성사, 대한전선 등 대기업의 주요 사업영역은 냉장고나 TV, 전자레인지 등 가전분야였다. 컴퓨터 관련기술이나 노하우가 전무했던 데다 컴퓨터 산업에 대한 전망도 밝지 않다는 비판적 시각이 팽배해 눈을 돌리지 안았던 것이다. 그러나 1975년을 전후해 국내 컴퓨터 도입이 활발해지고 OCE같은 중소기업에서 미니컴퓨터 단말기를 국산화하면서 인식을 전환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이에따라 부랴부랴 시장진출을 검토하기 시작한 대기업들은 미국과 일본계 기업과 제휴, 합장생산을 추진하거나 외국기업의 대리점 사업을 통해 노하우를 축적하려는 두 가지 모습으로 구체화시켜 나갔다. 금성전기와 선경이 NEC의 미니컴퓨터 조립생산을 검토한데 이어 대한전선은 후지쯔의 파콤 시리즈 생산을 추진했다. 금성통신과 동양정밀은 합작회사인 한국시스템산업을 설립했다. 이와는 달리 삼성전자-휴렛팩커드, 금호실업-왕래버러토리즈, 오리콤-DEC, OPC-DG, 한국화약-포 페이스, 효성-히다찌, 금성사-하니웰 등은 외국업체의 국내 총대리점 사업으로 방향을 모색했다.
삼성전자는 76년 10월 HP와 총판계약을 체결하면서 가전부문에 이은 컴퓨터 업계 선두주자로 나서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에 대해 금성사는 78년 8월 컴퓨터사업부를 신설하고 미국 하니웰 대리점 사업으로 맞대결 작전을 펼친다.
76년부터 79년 말까지 삼성전자가 국내 공급한 HP 3000 미니컴퓨터는 2천대를 육박할 정도로 성공을 거둔다. 이는 DEC나 DG, 왕 등 미니컴퓨터 3대 트로이카를 앞지르는 것이었다. 반면 금성사는 같은 기간 럭키화학에 하니웰 한 대를 공급하는데 머물러 삼성에 완패했다.
삼성전자 컴퓨터시스템부가 급성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77년 8월. 서울대를 위시한 8개 국립대학과 연세대가 컴퓨터 도입기종 일괄 입찰에서 삼성을 선정한 것이다. 이 입찰은 문교부가 고급 전산기술 인력 양성과 대학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을 꾀할 목적으로 국제개발은행(IBRD) 자금을 동원, 75년부터 추진한 것으로 전사회적인 관심을 받았다. 참여 업체만도 삼성(HP)에 이어 동양물산(일본 오키전기), 동양전산기술(DEC), 한국전자계산(미국 프라임) 등 10개사로 경쟁이 치열했다.
당시 HP 본사의 자금지원이 맹렬했던 삼성전자가 대학 공급권을 따내기 위해 덤핑도 불사했던 것은 교육기관이자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파급효과를 노렸던 때문이다. 실제로 이전까지 HP 공급실적이 한 대에 머물던 삼성은 9대를 공급한 것을 계기로 상황을 역전시키게 된다. 삼성전자 컴퓨터 사업부문은 초대 컴퓨터시스템부장 전인수를 비롯해 영업과장 김영한, 지원과장 임득순 등이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다.
한편 하니웰 독점총판계약을 체결한 금성사는 끝끝내 삼성전자 추격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76년 출범한 금성중앙연구소가 국산화한 금전등록기나 전자식 출납회계기인 사무기기 공급에 주력했던 것도 한가지 이유였다. 금성사는 삼성전자와는 달리 이들 전자 사무기기를 마이크로 컴퓨터칩을 이용한 최첨단 컴퓨터 응용기기로 여겼던 것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반도체 신회의 역사를 거듭하며,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고, 금성사는 1995년 LG전자로 사명을 바꾼 이후 세계적인 가전 기업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