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35)- '인물로 본 IT 파이오니아_1편'
1960년~70년대 한국 IT산업을 이끌었던 주요 리더
“우리가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이찬진 사장을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의 기린아라고 높이 평가하지만 사실 아래아 한글은 어느날 갑자기 이찬진 사장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제품이 아니다. 이 제품이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많은 선구자들이 기술개발에 투자하고 노력한 결실이 맺어진 결과라고 봐야 더욱 정확할 것이다.”
한국의 IT산업은 지난 60여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 기간동안 국내 IT업계는 수많은 경영자를 배출했다. 물론 보는 이들에 따라 이들의 공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도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주변 여건이 불투명하고 AI시대를 맞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치열한 경쟁 체제에 진입했다.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현실에서 중국의 추격은 더욱 거세지고 있으며, 세계는 몇몇 빅테크 기업들이 디지털 시장을 넘어 세계 경제의 맹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의 디지털 산업은 지금 백척간두에 서 있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이러한 시대에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리더들이 존재해 위기를 극복했다. 리더는 늘 위기에 빛이 나기 마련이다.
시대의 구습을 과감히 탈피하고 뛰어난 리더십을 갖춘 CEO들은 오늘날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 용기있는 경영자는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가운데 ‘CEO가 어떤 인물인가’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즉, 최고경영자의 ‘얼굴’이 해당 기업의 실제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주식시장에서 최고경영자의 자리 이동이 해당기업의 주가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과거와 달리 최고경영자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지만 반대로 부실경영에 따른 책임도 더욱 엄격해 졌다는 뜻일 것이다. 최고경영자는 비록 시대와 국가를 달리한다 해도 기업의 사활을 좌우하는 중요한 자리임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더욱이 기존과는 전혀 다른 경영 패러다임이 등장하는 요즘 최고경영자의 자리는 더욱 중요해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주용에서 최수연까지’. 지난 60여년간 국내 IT업계는 빠른 발전속도 만큼이나 많은 ‘스타급’ 경영인들을 배출했다. 왜 이들에게 ‘스타’란 딱지가 붙었을까. ‘스타’ 경영인들은 나름대로 많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다.
이들에겐 파이오니아(개척자) 정신이 가득찼다.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번 실패는 좌절도 아니다. 늘 실패하면서도 끊임없이 재도전했다. 개척자 정신이 있었기에 그들의 명성은 오늘날 더욱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둘째, 이들은 전문가 이상의 기술을 보는 안목을 가졌다. 경영자라고 기술을 등한시해서는 금물. 특히 IT분야일수록 기술을 보는 시각은 남달라야 한다. 기술에 대한 넓고 깊은 안목, 정상의 톱경영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다.
셋째, 나름대로 확고한 경영관을 갖고 있었다. 배를 지휘하는 선장이 뚜렷한 방침을 세우지 못하면 이미 그 배는 폭풍우속에 가라 앉게 될 것이다. 뚜렷한 경영철학과 소신만이 험난한 기업환경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초석이 된다는 것을 이들은 몸소 보여줬다.
다섯째, 분석가 이상의 시장을 보는 혜안을 가졌다. 시장은 늘 변화무쌍하다. 때문에 시장 트렌드에 대해 항시 면밀히 주목해야 한다. 시장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분석하는 한편 나름대로 미래 시장에 대해 예측을 한다. 물론 국내 시장 뿐만 아니라 해외시장 동향도 마찬가지다.
여섯째,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찾아 다니고 이를 제품과 기술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스타 경영인들은 때로는 전문 경영인으로서 혹은 벤처기업가로서 나름대로 자신의 영역에서 시장과 기업을 키우고 한국의 컴퓨터 산업을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이중엔 한국경제를 대표하는 CEO로 우뚝 솟은 인물도 있는 반면에 실패한 경영자로 낙인찍힌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척박한 국내 정보산업 토양을 옥토로 가꾸는데 많은 헌신과 기여를 했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 지난 60여년간 시대별로 한국 컴퓨터 산업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주요 IT업계 톱CEO와 기업 정보화의 초석을 딱은 CIO들의 흔적을 살펴본다.
▲60년대: ‘황무지’ 국내 IT산업, 해외파 출신 대거 경영자로
한국컴퓨터 산업의 태동기인 60년대 후반과 70년대, 한국의 컴퓨터 산업은 그야말로 ‘황무지’라는 표현이 적합했다. 이제 막 컴퓨터 산업이라는게 꽃을 피우던 시절, 국내에는 컴퓨터를 다루는 기업도 거의 없었거니와 또한 컴퓨터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경영자는 더더욱 드물었다. 이런 와중에 선진문물을 익힌 많은 고급 인력들이 국내로 귀국해 경영일선에 나섬으로써 한국 컴퓨터 산업은 초창기 맥을 이어 가게 된다.
초기 한국 IT업계의 톱경영인들은 주로 미국에서 공부했거나 미국 기업에 근무한 경험을 가진 인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여기에는 외국계 기업의 잇딴 對韓진출도 한몫했다. 외국기업들은 미국기업의 특성과 언어 등 서구의 기업 문화를 익히 경험했고, 한국 기업의 문화와 언어에 능통한 인물을 경영자로 임명했다. 더욱이 한국에서도 컴퓨터는 선진 기술이었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는 고급인력들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이들로부터 국내 IT산업 인맥이 형성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당시에는 특히 외국계 컴퓨터 회사들이 국내 정보산업의 중요한 버티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컴퓨터 기업이라고 해봐야 고작 외국계 기업의 현지법인이거나 또는 외산 컴퓨터업체의 국내 대리점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회사에 몸담고 있던 직원들은 70~80년대를 거치면서 주요기업체 최고경영자로 변신, 국내 정보산업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한국의 초창기 IT산업을 거론할 때 반드시 떠올리는 두 거목(巨木)이 있다. 성기수 전 KIST 전산실장과 한국전자계산소 이주용 소장(전 KCC정보통신 회장)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선진 IT기술을 답습하고 돌아온 유학파 출신으로써 초창기 한국의 정보산업을 정착시키고 한단계 도약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오늘날 가장 존경받는 IT업계 원로 가운데 한명인 성기수 소장은 당시 하바드대를 졸업한 후 여러 대학에서 교수 초빙을 받았으나 당시 KIST 최형섭 소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KIST 전자계산실에 합류하게 된다. KIST 전자계산실은 이후 시스템공학연구소(SERI)로 그 역할이 확대됐다. 성기수 소장이 이끌었던 SERI는 88서울올림픽 전산화 작업을 비롯해 수많은 국가 전산프로젝트를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정보산업계 고급인력의 산실인 ‘IT사관학교’로서 그 위상을 드높였다. 한국의 IT산업 발전 뒤에는 성기수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배어 있었다.

또다른 거목은 ‘한국컴퓨터 역사의 산증인’ 이주용 회장이다. 그는 58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대학졸업 후 IBM 본사에서 근무하던 이 회장은 1963년 한국IBM의 초창기 설립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 회장은 71년 한국전자계산소 대표로 부임하면서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의 씨앗을 뿌렸다. 이 회장은 컴퓨터데이터센터를 국내 최초로 설립한 것을 비롯, 키펀치 용역 수출의 선구자로서 한국 정보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과학기술진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전자계산소는 후에 KCC정보통신으로 간판이 바뀌고 이 회장의 장남인 이상현 사장이 대표로 부임하면서, 제 2의 시대를 열어간다. 한편 당시 한국전자계산소에서 소프트웨어 용역을 담당하던 전문인력들은 이후 톱라인의 인맥층을 형성했다.

한편 지난 67년 설립된 한국IBM은 60~70년대 한국컴퓨터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한국IBM을 거친 많은 직원들은 후에 국내 외국계 현지법인에서 임원이나 지사장으로 맹활약하게 된다. 한국IBM 진출 이후 많은 외국기업들의 잇딴 국내 현지법인 설립이 줄을 이었는데, 70년대 초까지 스페리(現 한국유니시스), 콘트롤데이타코리아(CDK), 후지쯔코리아 등이 한국시장에 속속 발을 들여놓았다.
60년대는 전반적으로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인맥들이 톱경영층을 형성했고, 이들이 수장으로 재직했던 기업이나 기관에서 근무했던 인맥들이 70~80년대는 물론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IT산업의 톱라인 계보를 이어갔다고 정리할 수 있다.
▲70년대: 대기업계열의 IT업체 전문경영인 ‘각광’
IT산업이 본격적인 하나의 산업으로 틀이 잡힌 70년대. 70년대 국내 IT산업을 형성했던 주요 기업들은 한국IBM, 콘트롤데이타코리아 등의 외국계 현지법인과 한국전자계산소, 서울컴퓨터 센터 등의 공공기관, 한국뉴콤, 동양시스템산업 등 미니컴퓨터 전문공급회사 등 3부류다. 특히 국내 기업들이 하나 둘씩 IT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CEO 인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국내 기업이 바로 동양전산기술이다. 동양전산기술(OCE)은 70년대중반 DEC 기종을 국내에 들여와 조립, 공급하면서 IT산업 초창기 시절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기업. 당시 OCE에 근무했던 인사들은 이윤기, 권순덕, 김영식, 이정희, 김병각씨 등인데, 이들은 후에 국내 주요 IT업체 CEO나 임원으로 발탁되면서 경영자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이윤기 회장과 김영식 사장은 후에 이용태 회장이 설립한 애플컴퓨터의 국내 총공급원인 엘렉스컴퓨터의 최고경영자로서 임명돼 매킨토시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이들은 단순히 제품을 들여와 판매하는데 그치지 않고 맥용 소프트웨어를 자체 개발해 보급하는 등 국내 DTP시장에도 많은 변화를 몰고왔다.
70년대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막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당시 소프트웨어 산업이라 봐야 기껏 키펀치 용역 수준. 당시 가장 잘나가던 소프트웨어 용역 회사는 이주용 소장이 이끄는 한국전자계산소(현 KCC정보통신). 한국전자계산소는 미국에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70년대 초반까지 정부 및 주요 공공기관의 전산용역을 사실상 과점하다시피 했다.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국내 기업들 가운데 컴퓨터 업체라고 부를만한 기업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에는 주로 삼성이나 금성, 대우, 금호, OB 등 주로 대기업의 일개 사업부에 있다가 별도법인을 설립해 출범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대기업들의 IT산업 진출이 잇따르면서 최고경영진의 면면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됐다.
70년대 외국계 기업체 사장 가운데 대표적인 CEO로는 스페리(유니시스)코리아의 해리화성김 사장과 한국IBM의 최은탁 사장을 꼽을 수 있다.
해리화성김 사장은 88년 조완해 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16년간을 사장직에 재임, 외국계 국내 현지법인 지사장 가운데 최장수 전문경영인으로 기록됐다. 해리화성김 사장은 35년생으로 경기고와 美 트로이주립대를 졸업, 66년 IBM을 거쳐 74년 스페리코리아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인화와 성실’을 경영의 최우선 모토로 내세웠던 해리화성김 사장은 재임시 IBM이 독점했던 범용컴퓨터 시장에 ‘유니시스’란 이름을 뚜렷이 부각시킨 경영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73년 한국IBM은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 직원인 최은탁씨를 지사장으로 선임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68년 한국IBM에 입사, 5년만에 최고경영자에 오른 최은탁 사장은 재임기간 동안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 취임 6년만에 10억원에 못미치던 매출액을 10배가 넘는 100억대 매출로 끌어올렸다. 특히 당시로선 외국계 기업들이 전혀 생각치 못했던 ‘한국기업으로서의 뿌리 내리기’에 착수, 다양한 학술지원 사업을 비롯, 국내의 젊은 과학자들이 IBM 왓슨 연구소에 1년간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최은탁 사장 재임시절 유능한 젊은이들이 대거 한국IBM에 입사했는데, 한국IBM을 거쳐간 수많은 경영자들이 IT업계에 포진하게 된 것도 최은탁 사장 재임시 입사했던 인물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초기 IBM 출신 인맥으로 조완해 전 한국유니시스 사장이 있다. 경북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2년뒤 창업멤버로 한국IBM에 입사했던 조 사장은 한국IBM 영업지원담당 전무를 거쳐 87년 9월에 왕컴퓨터코리아 부사장으로 옮긴다. 그러나 1년후 그는 한국유니시스로 자리를 옮기고 해리화성김 사장 뒤를 이어 한국유니시스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조완해 사장은 전문경영인답게 한국유니시스의 영업을 크게 키워 최고경영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음은 물론 10여년 넘게 지사장을 수행하는 국내 대표적인 장수 지사장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1974년에 미국계 기업이 판치던 국내 IT업계에 일본계 기업으로선 유일하게 파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가 국내 지사를 개설하고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후지쯔 초창기 멤버 가운데는 황칠봉 전 데이콤시스템테크놀러지 회장이 활약했다. 황 회장은 한국전자계산소, 파콤코리아를 거쳐 효성데이타시스템 사장을 역임했다. 황 회장은 그후 데이콤의 SI자회사인 데이콤시스템테크놀러지 대표로 자리를 옮겼다.
70년대 한국의 IT산업을 대표하는 경영자로 전상호 당시 한국전산(現 교보정보통신) 사장(전 농심데이타 사장)을 꼽을 수 있다. 전상호 사장은 69년부터 삼성전자 이사로 근무하다 75년부터 81년까지 한국전산 대표이사 사장직을 역임했다. 삼성정밀 사장을 거친 전상호 사장은 86년 초대 삼성데이타시스템(현재 삼성SDS) 사장을 맡은 후 지난해 농심데이타 사장을 마지막으로 현직에서 물러나 있다.
한편 77년도는 증권전산이 설립되던 해였다. 증권전산 창설요원으로 당시 김진흥 개발부장이 있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진흥 사장은 유한양행에 입사하면서 전산과 첫 연을 맺게된다. 이후 김진흥 사장은 정보전자계산소에서 시스템 매니저와 서울컴퓨터 센터 개발부장을 역임한 후 한국증권전산 창설요원으로 일한다. 한국증권전산을 거쳐 그는 동양그룹의 SI자회사인 동양시스템하우스에서 대표를 맡다, 네트워크 전문업체인 KDC정보통신의 대표이사직을 맡았다.
70년대 초는 국내 주요 은행들이 KBCC를 통해 컴퓨터를 공동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환은행은 처음부터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첫 온라인 뱅킹을 실현하는게 외환은행의 목표였다. 이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당시 외환은행 CEO였던 김우근 행장이다. 김우근 행장은 71년 미국 출장중 LA와 뉴욕간 송금 및 결제가 온라인으로 처리된 것을 보고 서울-부산간 외환은행의 온라인 뱅킹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