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9)- '원거리 데이터 통신의 효시'
데이터 통신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1970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산업무의 EDPS를 위해 경제기획원 예산국과 KIST 전자계산실간에 이루어진 통신이 그 효시다.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용량이었던 서울 홍릉 KIST 전산실의 CDC-3300과 광화문에 위치했던 경제기획원 예산국의 배치터미널인 CDC 200 UT가 체신부의 전용선과 모뎀 장비로 접속됐던 것이다.
1970년대 초만 해도 컴퓨팅 파워는 공간적인 제약사항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프로그램을 입력해서 처리된 결과를 터미널로 받아볼 수 있는 장소는 호스트가 설치돼 있는 전산실 내부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스트 정보를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터미널에서 받아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었던 셈이다.
국가적으로나 IT산업 발전면에서 큰 의미를 띠고 있는 예산업무의 EDPS화는 당시 예산총괄 과장인 강경식의 요청에 의해 KIST가 추진했다. 최초의 정부기관 용역이기도 했던 이 프로젝트는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순시하던 70년 4월 7일 표면화돼 KIST 전산실 연구원 안문석(고려대 명예교수)의 '예산업무의 EDPS화에 관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진행됐다.
방대하고 복잡한 예산관련 자료를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파악, 분석하기 위해 시작된 예산업무의 EDPS화는 구체적으로 KIST 전산실의 컴퓨팅 파워를 공유함으로써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자료의 온라인 출력, 국회 예결을 거친 예산의 집행 및 결산을 자동으로 처리하는데 목적을 두고 진행됐다. 여기서 터미널 설치는 이 프로젝트의 핵심 사업중 하나였다. CDC 200 UT 터미널은 KIST의 전산처리 결과치를 예산국이 온라인으로 받아볼 수 있게 해 준 도구였다.
기획원 예산국에 설치된 CDC 200 UT 배치터미널은 분당 3백매의 카드를 읽을 수 있는 카드 리더와 라인프린터, 오퍼레이터용 디스플레이 콘솔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여기에 모뎀은 미국 릭슨(Rixon)사의 PM-24A가 사용됐는데, 전송속도는 300bps급에 불과했다. 릭슨 PM-24A는 국내 최초로 도입된 데이터통신용 모뎀으로 훗날 KIST 전산실 내에 데이터통신 그룹이 발족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 국산 모뎀 시제품 개발의 초석이 됐다. KIST의 성기수와 안문석, CDK의 이규설,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 강경식 등이 이 프로젝트의 주역들로 통한다.
터미널 개통식이 있은 70년 6월 21일에는 터미널이 무병장수하길 기원하는 뜻에서 돼지머리를 준비하고 고사를 지냈다. 이에 대해 한 신문에서는 '최첨단 만능 컴퓨터 앞에서 고사를 지냈다'며 비아냥거리도 했지만 이는 당시 사회적인 관심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예산업무 EDPS에 앞서 KIST 전산실은 IBM에 타당성을 의뢰했는데, IBM측은 체신부의 전화선 상태가 불량, 데이터통신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강경식은 이를 무시했고 이것이 오히려 KIST측에서 작업강행을 독려하게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KIST측은 인공위성으로 미국 LA까지 데이터 통신을 꾀했으나 기술데이터를 교류할 필요성이 없는 데다 통신 중계소간 통화내용 지불 방식이 당시 우리 사정으로는 복잡하여 실현되지는 못했다.
한편 CDC 200 UT와 릭슨 PM-24A 콤비는 이어 71년 12월 덕수상고를 비롯해 중앙관상대, 농림부 양정국, 전매청 등에 도입되며 국내 초창기 데이터통신 시대를 주도해 간다. 성기수 박사가 '주판알 없는 상업학교 교육'을 역설한 것을 계기로 데이터통신의 기수가 된 덕수상고는 이미 전산개론과 FORTRAN, COBOL 등 컴퓨터 관련 과목 교육을 실시하는 등 컴퓨터 부문에서 타학교보다 앞서 있었다.
이후 CDC Cyber 72-14를 도입한 KIST 전산실은 73년 5월 KIST 시내분실에 CDC 732 MSB(Medium Speed Batch Terminal)를 설치, 프로그래밍 언어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실습 및 시내에서 직접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어 같은해 KIST 전산실은 CDC 217 디스플레이 터미널 두 대와 713 디스플레이 터미널 한 대를 도입하며 데이터통신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74년에는 M-38 텔레타이프를 도입하여 그해 7월 최초로 서울에서 400Km 이상 떨어진 전남 송정리 삼양타이어 공장에 M-38을 설치, 장거리 선로를 이용한 데이터통신에 성공했다. 삼양타이어의 터미널 설치는 당시로서는 가장 장거리이면서 국내 처음으로 4800bps 속도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KIST 전산실과 기획원 예산국간의 터미널 설치 이상의 기념비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 데이터통신은 74년 이후 본궤도에 들어설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일련의 노력들은 73년 봄에 조직된 KIST 전산실의 데이터통신 그룹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1974년 300bps급 국산 모뎀 시제품을 완성하게 된다. 이 모뎀 시제품 개발은 결과적으로 80년대 후반 콤텍시스템과 데이터콤이 탄생의 배경이 됐고, 양사는 이후 현재 국내 데이터통신 발전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사진설명: 컴퓨터 시대가 혁명을 몰고올 것이라는 조선일보 1970년 7월 22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