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통신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1970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산업무의 EDPS를 위해 경제기획원 예산국과 KIST 전자계산실간에 이루어진 통신이 그 효시다.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용량이었던 서울 홍릉 KIST 전산실의 CDC-3300과 광화문에 위치했던 경제기획원 예산국의 배치터미널인 CDC 200 UT가 체신부의 전용선과 모뎀 장비로 접속됐던 것이다.

데이터 통신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1970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산업무의 EDPS를 위해 경제기획원 예산국과 KIST 전자계산실간에 이루어진 통신이 그 효시다.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용량이었던 서울 홍릉 KIST 전산실의 CDC-3300과 광화문에 위치했던 경제기획원 예산국의 배치터미널인 CDC 200 UT가 체신부의 전용선과 모뎀 장비로 접속됐던 것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둘러싼 시비가 법정으로 비화돼 컴퓨터 업계를 비롯한 각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84년 8월 '일반업무와 회계실무'의 저자인 김명호가 스포트라이트 대리점인 연시스템시티 대표 이광희를 상대로 '컴퓨터 프로그램 무단복제 및 판매에 따른 손해액 1천만원을 보상하라'는 소송을 서울 민사 지방법원에 낸 것이다. 이는 국내 최초의 소프트웨어 무단복제에 대한 손해배상 청수 소송으로서
퍼스널 컴퓨터 시장이 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급팽창 기로에 선다. 70년대가 컴퓨터에 대한 무지가 보편적인 시기였다면, 80년대 초는 기업에서 사무자동화의 일환으로 컴퓨터를 인식하는 데까지 발전한다. 그러던 것이 83~84년을 기점으로 교육용PC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일대 전환의 시기를 갖는다. 일반 가정 생활용품으로 PC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1980년대 들어 개인용 컴퓨터는 국내외적으로 각광을 받으며 다양한 용도에서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애플이나 탠디, IBM, 오스본, 쿠퍼티노 등이 대표적 회사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독자적인 플랫폼에 기반해 설계된 것들이어서 타기종 소프트웨어와 호환되지 않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이와는 또다른 축을 형성한 것이 호환기 생산업체들이었다. 독자 개발능력 없이 IBM이나 애플같이 당대 유력 제품을 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