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국내에 컴퓨터가 도입된지 어언 6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국내 디지털 역사 속에 가장 중요한 이벤트들 중 100가지 이슈를 골라 정리했습니
1983년은 국내 컴퓨터산업 역사의 일대 전환기로 기록된 해였다. 정부는 83년 1월 28일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정하고, 이의 실현을 위한 각종 시책을 전개해 나가겠다고 선포했다. 이는 단지 정부 차원에서 정보화 실현을 위해 각종 시책을 펼치고 수천억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아직은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정보산업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산업분야로
1983년 '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전후한 시기 정부의 정보화 시책 가운데 핵심은 대국민 컴퓨터 교육과 홍보였다. 컴퓨터 교육은 전문인력 양성이라는 차원에서 각급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했다면 홍보는 정보화 마인드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학생을 포함한 일반인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따른 방편의 일환으로 과학기술처는 두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각 교육기관에 교육용 컴퓨터를 보급하는 '교육용 컴퓨터
우리나라에서 PC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81년 말. 컴퓨터 역사가 일천한 국내 상황에서 PC가 비교적 일찍 도입돼 사용된 것은 같은해 뉴스위크나 타임, 뉴욕타임즈 등 외지에서 IBM PC와 관련한 기사가 대서특필됐기 때문이다. 외국 유력지들은 PC라는 매우 생소한 단어에도 불구하고 IBM이라는 초대형 공룡기업이 발표했다는 점에서 장래성에는 의심을 갖지 않았다. 원래 PC란 Personal Computer의
70년대 경제개발을 이끈 견인차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3차(72~76년)와 4차(77~8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경제·사회·문화 전범위를 포괄하는 수준으로 광대한 것이었다. 여기에 과학기술정책이 포함된 것은 4차때부터였고, 이를 시발로 국내 정보산업은 발전의 거보를 내딛게 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가져왔지만, 그 반대급부도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을 근간으로 5대 국가기간전산망인 행정전산망·금융전산망·교육연구전산망·국방망·공안망의 틀이 갖추어진 것은 87년의 일이다. 이 법령에 따라 86년 5월 자금지원을 위해 한국통신진흥이 세워졌고, 87년 1월에는 전산망 감리 및 표준을 위해 한국전산원(현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이 출범했다. 또 행정전산망 전담사업자로 한국데이터통신이, 금융전산망은 금융결제관리원, 교육연구전산망은 시스템공학센터(현 ETRI)
PC혁명의 발단이 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71년 인텔에 의해 처음 개발됐다. 첫 모델은 4004. 외부와 데이터를 주고받는 버스 단위가 4비트로서 현재 64비트 펜티엄 마이크로 프로세서와 단순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4004는 이후 8080, 8088 마이크로 프로세서로 이어지며 오늘에 이른다. 미국에서 808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컴퓨터 CPU로 채택한 마이크로 컴퓨터(당시에는 PC라는 용어가
외산업체와 국내 대리점, 소프트웨어 용역개발 업체 위주의 컴퓨터 산업계에 국내 대기업이 진출해 한판승부를 예고한 것은 1976년. 당시 삼성전자나 금성사, 대한전선 등 대기업의 주요 사업영역은 냉장고나 TV, 전자레인지 등 가전분야였다. 컴퓨터 관련기술이나 노하우가 전무했던 데다 컴퓨터 산업에 대한 전망도 밝지 않다는 비판적 시각이 팽배해 눈을 돌리지 안았던 것이다. 그러나 1975년을 전후해
외산 컴퓨터 업체들이 입지를 확보하고 민간 소프트웨어 용역업체들이 하나둘 진용을 갖추어 나가면서 우리것을 만들려던 시도가 1972년부터 구체화돼 나타났다. 컴퓨터가 들어온지 5년만의 일이다. 물론 60년대 초반 한양대 이만영 교수의 진공관식 아날로그 계산기나 한글 라인프린터가 있었지만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국산 컴퓨터는 73년 2월 완성된 미니컴퓨터 '세종 1호'가 효시로 기록되고 있다. 세종 1호는
미국 중심의 컴퓨터 업체들이 비교적 일찍부터 국내 토착화에 나선 것과는 달리 일본계 컴퓨터 업체로는 후지쯔가 74년 2월에서야 진출하며 비로소 물꼬가 트였다. 후지쯔는 서울 종로 소재 합통통신회관빌딩에 100% 출자한 현지법인 화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를 설립했다. 화콤코리아 진출은 뒤이어 히다치와 NEC의 국내 진입을 부르게 된다. 화콤코리아는 미국계가 휩쓸던 국내 컴퓨터 업계에 견제세력으로
컴퓨터가 점차 산업계 전반에 걸쳐 새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하면서 미니컴퓨터 업체들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중대형급 컴퓨터의 도입비율은 감소하는 대신 미니컴퓨터 도입은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60년대 말까지 국내 도입된 컴퓨터는 IBM의 S/360, 일본 후지쯔의 파콤 시리즈, CDC의 CDC 시리즈, 스페리랜드(유니시스)의 유니백 시리즈가 컴퓨터 산업의 중추를
컴퓨터 보급이 활발해짐과 아울러 컴퓨터의 신기한 능력에 곳곳에서 감탄의 소리를 연발하고 있을 즈음 이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한다. 73년 10월 서울 반포 AID차관아파트 부정 추첨사건이 그것으로, 국내 최초로 컴퓨터를 악용한 사례로 기록된 것이다. 반포 AID차관아파트는 정부가 서울 강남지역 개발계획에 따라 미국 국제개발국(AID) 자금을 들여와 짓고 있던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국내 대학 가운데 컴퓨터 도입의 첫 테이프를 끊은 곳은 1969년 1월 서강대학교였다. 미국 스페리랜드(현 유니시스)가 제작한 'USS-80(Univac Solid State-80)'을 당시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기증받았다. 1960년 처음 미국에 설치된 USS-80은 이후 연세대가 도입한 기종과도 같은 것으로, 컴퓨터 세대별로 보면 2세대에 속했다. 도입에 앞서 서강대는 김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