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국내에 컴퓨터가 도입된지 어언 6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국내 디지털 역사 속에 가장 중요한 이벤트들 중 100가지 이슈를 골라 정리했습니
한국의 IT산업은 지난 60여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 기간동안 국내 IT업계는 수많은 경영자를 배출했다. 물론 보는 이들에 따라 이들의 공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도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주변 여건이 불투명하고 AI시대를 맞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치열한 경쟁 체제에
정부는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범국민적으로 추진한다는 기본 방침을 세우고 국내 이산가족 재회, 해외동포 이산가족 연결, 남북한에 흩어진 이산가족의 재결합 등 3개 분야로 나누어 추진키로 했다.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방영된 KBS TV의 특별기획 '이산가족, 지금도 이런 아픔이'의 가족 찾기 생방송은 전국민을 감동과 충격 속에 몰아 넣었고
제5공화국의 11대 총선은 컴퓨터 역사에도 중요한 일획을 긋는 것이었다. 81년 3월 25일 치러진 총선에 KBS가 개표 전산시스템을 도입,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10시간 동안 TV로 생중계했던 것이다. 일반인에게 컴퓨터의 위력이 십분 전달된 사건이었던 셈이다. 총선개표전산시스템의 기반 시스템은 당시 잘나가던 프라임 기종. 중형컴퓨터인 프라임 750을 호스트로 전국 2백43개 개표소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중간
1980년대 들어 컴퓨터 보급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던 컴퓨터 산업 인프라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수십여 종이 난립해 있던 한글코드나 키보드 자판 배열의 통일 등 컴퓨터 표준화 작업이었다. 컴퓨터 표준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인 한글과 한자를 컴퓨터에 제대로 적용하려는 일단의 노력이기도 했다. 한글코드 통일은 기본적으로 키보드에서 한글을
컴퓨터 도입과 함께 몰아온 전산화의 물결은 금융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증권업계는 업무 특성상 정보의 신속한 전달과 의사결정의 적시성, 고객요구의 다양성 및 정보자료의 대량성이 기본인 만큼 경쟁전략의 일환으로 증권업무 전산화에 앞장섰다. 증권업무가 전산화를 시작한 것은 74년. 증권거래소가 처음으로 주식매매업무, 수도결제업무, 홍보업무 등을 전산화하면서부터였다. 당시만 해도 증권거래소가 29개 증권사를 대신해 투자고객으로부터 수탁받은
과기처의 1983년 '정보산업의 해' 선포와 관련, 정부는 정보화 실현 시책의 하나로 다음해인 84년부터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를 열었다. 84년 4월 22일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는 이미 1년여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던 만큼 세인의 관심을 모은 행사였다. 전국에서 선발된 3백여명의 초중고생들이 오전 9시 개회식에 이어 9시 20분부터 PC 앞에 앉아 시험을
1983년은 국내 컴퓨터산업 역사의 일대 전환기로 기록된 해였다. 정부는 83년 1월 28일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정하고, 이의 실현을 위한 각종 시책을 전개해 나가겠다고 선포했다. 이는 단지 정부 차원에서 정보화 실현을 위해 각종 시책을 펼치고 수천억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아직은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정보산업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산업분야로
1983년 '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전후한 시기 정부의 정보화 시책 가운데 핵심은 대국민 컴퓨터 교육과 홍보였다. 컴퓨터 교육은 전문인력 양성이라는 차원에서 각급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했다면 홍보는 정보화 마인드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학생을 포함한 일반인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따른 방편의 일환으로 과학기술처는 두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각 교육기관에 교육용 컴퓨터를 보급하는 '교육용 컴퓨터
우리나라에서 PC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81년 말. 컴퓨터 역사가 일천한 국내 상황에서 PC가 비교적 일찍 도입돼 사용된 것은 같은해 뉴스위크나 타임, 뉴욕타임즈 등 외지에서 IBM PC와 관련한 기사가 대서특필됐기 때문이다. 외국 유력지들은 PC라는 매우 생소한 단어에도 불구하고 IBM이라는 초대형 공룡기업이 발표했다는 점에서 장래성에는 의심을 갖지 않았다. 원래 PC란 Personal Computer의
70년대 경제개발을 이끈 견인차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3차(72~76년)와 4차(77~8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경제·사회·문화 전범위를 포괄하는 수준으로 광대한 것이었다. 여기에 과학기술정책이 포함된 것은 4차때부터였고, 이를 시발로 국내 정보산업은 발전의 거보를 내딛게 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가져왔지만, 그 반대급부도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을 근간으로 5대 국가기간전산망인 행정전산망·금융전산망·교육연구전산망·국방망·공안망의 틀이 갖추어진 것은 87년의 일이다. 이 법령에 따라 86년 5월 자금지원을 위해 한국통신진흥이 세워졌고, 87년 1월에는 전산망 감리 및 표준을 위해 한국전산원(현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이 출범했다. 또 행정전산망 전담사업자로 한국데이터통신이, 금융전산망은 금융결제관리원, 교육연구전산망은 시스템공학센터(현 ET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