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11)- '반공 분위기 속 주민등록 전산화'

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11)- '반공 분위기 속 주민등록 전산화'

KRG

만 18세가 되면 발급되는 주민등록증. 13자리 번호와 지문을 통해 신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의 역사는 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내무부 경사이던 노연후씨가 미국 범죄관련 전문지 아이덴티피케이션을 우연히 접한 후 범죄감식에 대한 구상을 하게 되면서였다.

68년 노연후가 작성한 '전국민의 지문 등록에 관한 연구' 보고서는 당시 유재덕 총경의 허락을 받은 다음 내무부 치안참모회의에서 바로 추진결정이 내려졌다. 이 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 했지만 호사다마랄까, 당시 내무부 출입기자들이 정부의 전국민 지문 등록에 관한 일련의 추진 계획을 듣게 된다.

다음날 조선,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에서는 정부가 국민의 통제수단으로 지문을 채취해 인권을 유린하려 하고 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언론이 내무부의 행동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이 일이 언론에 공개되자 박경원 당시 내무부 장관은 사태의 조기진화를 위해 내무부 전체에 함구령을 내리고 없었던 일로 붙여버렸다. 이렇게 해서 전국민 지문등록 방안은 실질적인 작업에 들어가기까지 파란의 역정을 겪게 된다.

그러던 중 당시 30살이던 노연후는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을 만나 일련의 사건에 대한 내용과 지문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김신조 등 간첩들이 출몰하던 어수선한 상황에 '전국민이 지문을 등록하고, 지문 대조 결과 등록돼 있지 않으면 간첩'이라는 설득이 제대로 먹혀들어 치안본부에는 감식계 전산반이 발족되고 곧이어 지문등록을 통한 전산화가 시작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추진된 주민등록 전산화 실무작업은 컴퓨터 선정 및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많은 해프닝을 만들어 냈다. 기본적으로 어떻게 전산화할 것이냐는 문제부터 발목이 잡힌 다.

당시 18세 이상 국민은 1천400만명. 이들의 지문을 채취해 주민증을 만들기 위해서는 코딩하고 분류하는 데만 2천명이 5년에 걸쳐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수작업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고, 이에 국내외 컴퓨터 관련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 과정에서 '미국에 갔더니 집채만한 기계가 카드에 구멍을 뚫어 눈깜짝할 시간에 카드를 처리하더라'는 내용과 함께 그 기계에 IBM이라고 붙어 있더라는 말이 나왔다.

이에 주민등록증 전산화 실무진은 이름하여 '주민등록의 아이비엠화 계획'을 만들어냈다. 노연후 당시 경사는 '우스운 얘기지만 당시에는 전산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고는 이룰 처리할 수 없다는 것만 아는 정도였다'며 그때 상황을 회고했다.

68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 주민등록 전산화는 71년 예산이 수립되면서 72년에서야 기계가 도입된다. 하지만 내무부에 컴퓨터가 도입된다는 소문이 71년부터 나돌면서 또 한번의 진통을 겪게 되는데, IBM과의 계약 건이 유니백이 참여하면서 무산되고 유니백 9400이 도입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2년간 개발에 들어간 주민등록 전산화는 77년 다시 IBM으로 바뀌어 설치, 운영에 들어가 당시 치안본부 전자계산소에는 유니백 9400, IBM 360 두 기종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전산화 규모는 2억원으로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사진설명: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11월 21일 종로구 자하동장으로부터 국내 제 1호 주민등록증을 받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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