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12)- '민간 소프트웨어센터의 출현'

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12)- '민간 소프트웨어센터의 출현'

KRG

1970년대 자생적으로 태동한 국내 IT산업은 크게 양대 축을 이루며 성장해 왔다. 하나가 외국 업체들의 국내 진출에 따른 하드웨어 판매였다면, 또 다른 축은 소프트웨어 용역이었다.

종래 오랜 관습과 구태의연한 수작업에 파묻힌 한국기업은 전통적으로 기업의 자료 공개를 꺼렸다. 또 컴퓨터에 의한 업무처리 효과를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본 것도 사실이다. 당시 정보화 사회라고는 하지만 이에 대한 인식이 너무 관념적이고, 기업경영이 정보에 의해서 보다 비경제적 요인에 의존하고 있던 풍토이고 보면 자칫 컴퓨터는 경영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경영을 비합리화시키는 사치나 허영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은행이나 국영기업체 등이 눈을 먼저 뜨고 컴퓨터에의 접근을 시도하면서 이런 인식들은 차츰 수그러들게 됐다. 한편으로는 컴퓨터를 도입하기에 앞서 업무개발이나 컴퓨터 운영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컴퓨터 용역회사를 찾으며 컴퓨터와의 간격을 좁혀갔다.

당시 용역은 크게 세가지 형태로 구분됐다. 천공카드에 구멍을 뚫어주는 키펀치 용역과 컴퓨터 도입기관의 업무개발 용역, 외산 패키지를 도입해서 기업 상황에 맞게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해 주는 업버전 용역이 그것이다. 즉 업무전체를 위탁하여 용역처리하기보다는 사전조사나 타당성 여부 차원에서, 아니면 단순하지만 복잡한 수작업이 필요한 업무가 용역의 주요 부분이었다. IT산업분야에서 보면 빙산의 일각만이 재래의 수레바퀴를 벗어난 것이지만 훗날 정보화를 향한 준비라는 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국내 키펀치 용역에 의한 소프트웨어 수출 1호는 1969년 한국전자계산소로서 이를 시발로 KIST 전자계산실과 서울컴퓨터센터, 광운대 전자계산소, 나라교역, 한국보험전산(현 교보정보통신), 인터내셔널 컴퓨터 리소스(ICR), 동일컴퓨터센터 등이 설립된다.

과학기술처 정보관리실의 통계치에 따르면 키펀치 용역 수출은 69년 5천달러이던 것이 70년 2만달러, 71년 5만5천달러, 72년 60만5천달러로 급증했다. 이어 73년 244만달러, 74년에는 468만달러로 배 이상의 성장을 기록했다. 국내 컴퓨터에 대한 인식이 꿈틀대고 있을 무렵 한편에서는 수출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외형 급증과 더불어 정부는 상공부를 통해 키펀치 용역을 장려하는 각종 시책을 펴게 된다. 일례로 72년 12월 한국전자계산용역수출조합이 결성됐다. 덩핑수출과 같은 업계간 과당경쟁을 방지하고, 인력 양성과 시장개척에 공동 대응하는 것을 골격으로 한 이 조합은 해외시장정보 수집의 창구가 되기도 했다. 또 당시 융성하던 대형 수출상사와의 계열화 등을 유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키펀치 용역 수출은 권장할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주요 수출국인 미국과 일본에서 의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지 인건비가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3국의 키펀치 요원에 대한 시간당 임금을 보면 미국이 5.7달러, 일본이 3.65달러였던데 비해 한국은 0.33달러에 불과했던 것이다. 게다가 키펀치 용역 업체들이 영세했던 탓에 PCS 장비를 IBM이나 스페리랜드에서 임차해 운영했는데 PCS 임차비용이 수출 원가의 50%를 차지하는 등 채산성이 좋지 못했다. 결국 경쟁이 심화될수록 채산성은 더욱 악화되는 기형구조로 이어졌다.

한편 키펀치 용역수출이 소프트웨어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활성화되고 있을 즈음 일부 기업과 공공기관들은 본격적인 프로그램 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70년대 초반 한국전자계산소를 비롯해 KIST 전자계산실, 한국보험전산, 서울컴퓨터센터 등이 주도한 소프트웨어 개발·용역은 컴퓨터에 대한 기업 수요가 증가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고, 컴퓨터가 점차 이 땅의 산업계나 경제계에 침투하기 시작한 징후이기도 했다.

초기 소프트웨어 용역은 한국전자계산소(현 KCC정보통신) 주도로 이루어졌다. 한국전자계산소는 키펀치 용역부터 정부기관의 전산화 타당성과 설계용역,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분석 등을 담당하며 명성을 날렸다. 70년대 초반까지 정부 및 주요 공공기관의 용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지만 KIST 전자계산실이 컴퓨터를 도입한 이후 본격적인 용역사업에 참여하면서 입지가 위축된다. 그러나 특허관리 업무나 사학공제업무 등 프로그램 개발을 수주하며 변신에 성공, 74년까지 100만달러 수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전자계산소와 더불어 당시 잘나가던 곳이 서울컴퓨터센터였다. 한국자동차보험과 한국유리, 경성방직, 삼양식품 등 YMCA와 관련 11개 기업이 2천만원을 출자해서 설립한 전문 용역센터인 서울컴퓨터센터는 당초에는 출자사들의 업무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는데 취지에서 만들어 졌다.

서울컴퓨터센터는 68년 당시 서울 YMCA 총무이던 전택부가 세계일주를 다녀온 후에 컴퓨터 사업을 청년회에서 하자고 제의하면서부터 얘기가 시작됐다. 찬반양론이 있었지만 전자계산기 보급에 앞장서는 것이 뜻깊은 일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던 것. 이로써 출범한 서울컴퓨터센터는 컴퓨팅 파워면에서도 IBM 360-40과 CDC 3153 등 대형컴퓨터 2대를 도입, 당시 소프트웨어 센터 가운데 가장 화려한 위용을 갖췄다.

운영방식은 더욱 독특했다. 주주사들의 용역처리와 전산요원 양성을 주요 업무로 하되, 주주기업이 독자적인 컴퓨터 도입능력이 생기면 주식을 반납하고 새로운 주주를 영입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주기업들이 컴퓨터를 도입할 만한 준비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자, 당초 설립목적과는 달리 외부 용역업무를 처리하는 쪽으로 진로가 수정됐다. 그러나 이나마도 일부 특별한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는 거의 단순 통계업무가 대부분이었던 터라,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결국 서울컴퓨터센터의 존재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한국전자계산이나 서울컴퓨터센터보다는 출범이 늦었지만, 70년대 중반부터 줄기찬 성장을 거듭한 회사가 한국보험전산이다. 69년 은행 중심의 금융기관 전자계산본부가 출범하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대한생명 등 보험사들이 자극을 받아 일본 교에이보험을 끌어들여 71년 한일 합작으로 설립됐다. 초기 자본금 45만달러로 출범한 한국보험전산은 국내 보험산업의 전산화를 단기간에 육성한다는 취지 아래 보험업무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전표의 분류작업 전산화에 전력했다. 이후 72년 10월 한국전산(KICO), 95년 교보정보통신으로 상호를 바꾸고 소프트웨어 개발과 시스템 사업을 하며 SI업체로 자리잡았다.

이와는 달리 컴퓨터 조립생산이라는 기치 아래 대한전자공업주식회사가 69년 4월 설립돼 민간 소프트웨어 센터의 한축을 형성한다. 69년 7월 전자계산실 문을 열면서 UMS 3900을 일반에 공개하며 국내 조립생산의 의지를 직접 확인시켰다. UMS 3900은 미국 LAYTION사에서 부품을 도입해 모형을 만든 것이다.

원래 대한전자공업은 1970년대 초반까지 외국에서 수입한 재료로 컴퓨터를 조립하고, 차츰 국산화율을 높여 새 기종의 조립생산에도 손을 댈 계획이었다. 그러나 창립 당시의 신선한 이미지는 사라지고 소문만 무성한채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다만 대한전자공업이 컴퓨터 업계에 미친 영향은 교육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초기 컴퓨터 요원 양성에 일조했을뿐 아니라 70년대 들어서는 중학교 무시험 추첨 프로젝트를 용역받아 실시했던 점 등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사진설명: 키펀치 용역 수출이 새로운 외화획득원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동아일보 1970년 6월 24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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