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21)- '일본계 컴퓨터 기업의 국내 진출'

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21)- '일본계 컴퓨터 기업의 국내 진출'

KRG

미국 중심의 컴퓨터 업체들이 비교적 일찍부터 국내 토착화에 나선 것과는 달리 일본계 컴퓨터 업체로는 후지쯔가 74년 2월에서야 진출하며 비로소 물꼬가 트였다. 후지쯔는 서울 종로 소재 합통통신회관빌딩에 100% 출자한 현지법인 화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를 설립했다. 화콤코리아 진출은 뒤이어 히다치와 NEC의 국내 진입을 부르게 된다.

화콤코리아는 미국계가 휩쓸던 국내 컴퓨터 업계에 견제세력으로 등장하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있게 받아들여진다. 동시에 단순 키펀치 용역에 머물던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 수준을 OS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출범 3년만인 77년 화콤코리아는 무려 55만달러에 달하는 OS를 개발, 일본에 역수출하는 쾌거를 자랑했던 것이다.

화콤코리아가 국내 뒤늦게 진출한 것은 당시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67년 생산성본부에 파콤 222 기종을 판매한 후지쯔는 이후 화콤코리아를 설립할 때까지 11대를 한국에 공급했거나 계약한 상태로, 모두 일본 본사에서 직접 영업했다. 이는 1967년 현지법인이 설립된 IBM코리아의 22대 판매에 이은 2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매출호조에도 불구하고 후지쯔가 한국 진출을 미룬 것은 일본 본사조차 컴퓨터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현지법인 출자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내 컴퓨터에 대한 인식도 충분치 않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특히 11대 가운데 정부부처 및 공공기관 5대, 교육기관 5대, 포항제철 1대 등 절반 이상이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들여온 것이었던 만큼 후지쯔 입장에서는 별도의 판촉활동 없이도 영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포항제철을 고객으로 확보하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73년 포철이 발주한 전산설비를 수주하면서 화콤코리아 설립은 가시화 된다

실제로 포항제철은 IBM과 CDC, 스페리랜드 등 미국계 거물과 후지쯔가 경합을 벌인 유명한 곳. 쟁쟁한 실력들을 갖춘 거물들을 따돌리고 후지쯔가 당시 박태준 포철 사장의 최종 낙점을 받는데 성공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이러한 뜻밖의 상황에 대해 관계자들은 포철 설비공사의 모델케이스가 신일본제철소였고, 전산화 모델 역시 파콤을 사용하던 신일본제철소를 택했던 것이 낙점의 배경이 된 것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후지쯔의 현지법인 설립까지 연결됐던 것이다.

후지쯔는 한달만인 1973년 8월 경제기획원에 외국인 투자인가 신청서를 제출, 현지법인 설립 작업에 들어간다. 후지쯔가 화콤코리의 설립인가를 받아낸 것은 이로부터 5개월만인 1974년 1월. IBM이나 CDC의 경우 2~3개월이 소요된 것에 비하면 설립인가 기간이 긴 편이었는데 이는 후지쯔가 제출한 투자인가 신청서가 정부의 외자도입법에 배치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1973년 3월 개정된 외자법에 따르면 외국인 출자비율이 50%를 넘지 못하게 규정돼 있었다. 즉 합작법인 형태만 투자를 인가해 주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후지쯔는 처음부터 한국측 파트너를 확보하지 않은채 신청서를 접수했고 대신 '파콤용 OS를 개발, 제조, 수출하고 기술을 한국에 이전한다'는 내용의 투자사업 내용을 제안했다. 후지쯔 내에서도 이런 예외조치 수용을 위해 재무부와 상공부, 문교부, 과학기술처 등 관련부처를 직접 방문하며 양해를 얻어 마침내 조건부 투자인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칠봉 (당시 데이콤시스템테크놀러지 부회장), 김용대( 당시 SK컴퓨터통신 전무), 이의일(당시 세중컴퓨터시스템즈 대표), 송재형(당시 타스크포스시스템 대표) 등이 초기 화콤코리아 멤버로 활약했다. 화려한 인력을 기반으로 화콤코리아는 국내 진출 이후 승승장구를 계속한다. IBM 시스템/360을 사용하던 한국전력을 파콤230-45S로 대체시키는 등 호조를 보이며 출범 2년만인 1976년에는 26대를 공급하는 폭발적인 신장세를 기록한다. 이 시기는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과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한일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던 때로 후지쯔 직원들은 남다른 고충을 겪어 '외출시 일본어를 사용하지 말 것, 넥타이 차림의 정장을 입지 말 것' 등을 위에서 지시받았을 정도였다.

하드웨어 판매와 더불어 OS 개발 및 수출부문 역시 호조를 보였다. 작업관리를 비롯해 컴파일러, 어셈블러 번역기, 소트/병합 프로그램과 대화형 디버거, 유틸리티 등을 개발해 전량을 일본 후지쯔에 수출했다. 출범 첫해 14만달러이던 수출액은 1975년에는 39만달러, 1976년 55만달러, 1977년 76만달러등으로 급상승했다. 키펀치 용역에 의한 국내 수출 총액이 1975년 75만달러, 1976년 77만달러였던 것을 비교하면 대단한 저력을 보였던 셈이다.

<사진설명: 1974년 화콤코리아 설립 기념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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