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28)- '교육용 PC 5천대 보급계획'

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28)- '교육용 PC 5천대 보급계획'

KRG

1983년 '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전후한 시기 정부의 정보화 시책 가운데 핵심은 대국민 컴퓨터 교육과 홍보였다. 컴퓨터 교육은 전문인력 양성이라는 차원에서 각급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했다면 홍보는 정보화 마인드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학생을 포함한 일반인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따른 방편의 일환으로 과학기술처는 두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각 교육기관에 교육용 컴퓨터를 보급하는 '교육용 컴퓨터 5천대 보급 계획'이 그 하나이고, 각종 정부 시책을 알릴 수 있는 범국민적인 행사를 마련하기 위한 '제1회 전국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가 두 번째였다. 그러나 이들은 용두사미격으로 끝나고 말아 아직까지도 5공화국 시대의 전시행정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1982년 2월 과학기술처는 정부예산 10억원을 투자, 82년 말까지 실업계 고등학교와 과학관, 공공도서관 등에 교육용 컴퓨터 5천여대를 설치하고, 점차 인문계 고등학교와 중학교, 국민학교에까지 확대 보급하는 내용의 '교육용 컴퓨터 보급계획'을 발표했다. 연간 시장규모가 5백대도 되지 않던 상황에서 5천대 공급이라는 발표는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다.

이 계획은 이정오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새해 업무보고에서 나온 내용으로 컴퓨터 도입행정을 국산화 시책과 상호 유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그러나 새정부 출범 이후 첫 번째 가진 업무보고였던 만큼 다른 부처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처의 컴퓨터 보급계획 역시 무리한 부분이 많았다. 뭔가 화끈한 것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전조사는 물론이거니와 문교부와 상공부간에 충분한 협조가 이루어지진 못한채 발표됐다는 점에서 이후 많은 잡음이 야기된다. 보급 완료 시기를 연말로 계획해 놓고도 대상 기종 규격이나 조달방법에 대해서는 전자기술연구소(KIET)에 적절한 신형 모델 개발을 의뢰하거나 국산 생산업체 제품 구입을 검토중에 있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방안이 언급돼 있지 않았던 것이 단적인 예였다.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지지부진한 과정 속에도 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계기로 일정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83년 8월 해당 교육기관에 보급이 완료됨으로써 마무리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급만 완료됐을 뿐 '졸속행정'이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았다. KIET가 대행한 이 프로젝트는 5천대나 되는 PC를 어떻게 조달하느냐, 즉 기종 생산업체 선정 작업부터가 문제였다. 과기처에서 용역을 의뢰받은 KIET는 규격작업만 하기로 하고, 생산업체 선정은 상공부에 맡기는등 난항이 거듭됐던 것이다.

과학기술처는 대통령에게 보고한지 3개월만인 5월 KIET를 통해 교육용 컴퓨터를 새로 개발할 민간업체 선정에 나선다. 삼성전자, 동양나이론, 고려씨스템, 삼보컴퓨터, 금성사, 대한전선, 한국상역, 삼성전관, 제일정밀, 대성전자통신, 한국전자통신, 동양시스템산업 등 12개 업체가 사업계획서를 제출, 경합을 벌인다. 이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응용 프로그램 계획, 주변기기 등 4개 분야에 걸쳐 '교육용 컴퓨터 개발계획서'를 상공부에 제출하고 낙점을 기다렸다. 그러나 제출된 계획서 대부분은 프로젝트 수행계획을 소개했다기보다는 각사가 개발중이던 상업용 시제품 규격을 나열해 놓은데 불과했다.

이에도 불구하고 상공부는 적격심사를 벌여 삼성전자와 동양나이론, 삼보컴퓨터, 금성사, 한국상역 등 5개사를 선정, KIET에 통보했다. 공평하게 1천대씩 공급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떤 기준에 의해 결정된 것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탈락 업체들의 불만은 하늘을 솟았다. 어차피 KIET가 새로운 규격을 정할 텐데, 계획서에 적힌 시제품 규격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KIET는 7월에서야 기본 규격을 제시하고, 연내 설계도면과 운영지침서를 제출토록 했기 때문이다.

KIET는 원래 1983년 신학기 이전에 PC를 공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5개사는 기존에 독자 개발해 오던 것을 어떻게 하면 추가비용 없이 KIET 규격에 맞출 것인지 고민하며 허송세월로 시간을 보낸 끝에 결국에는 당초 예정보다 훨씬 이후에야 공급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다.

특히 납품 가격도 문제였다. 당초 KIET의 기본 규격은 매우 간단했다. 데이터 처리 성능은 8비트, CPU 속도와 기본 메모리는 각각 1MHz와 16KB 이상, 소프트웨어는 롬바이오스와 베이직 언어 번역기가 기본이었다. 그러나 83년 3월까지 5개사는 기본 규격을 훨씬 초과하는 고급 기종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과기처 납품과는 별도로 독자 시판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KIET가 처음부터 규격을 단순화했던 것은 예산 때문이었다. 대당 납품 가격을 24만원으로 미리 정해 놓고, 여기에 맞는 최소 사양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24만원에 제품 가격을 맞출 수 있는 컴퓨터는 불가능했다. 이에따라 5개사는 이 규격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서 아예 고급기종으로 방침을 굳혔다. 과기처 납품보다는 민간 수요 창출에 포커스를 맞추었고, 민간 판매가 50~60만원대 제품을 만들고 여기서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떼어내 납품한 것이었다. 그러니 기능은 오죽했을까. 겉만 컴퓨터였을뿐, 실행할 소프트웨어가 태부족인 것은 당연했다.

삼성 SPC-1000, 삼보 트라이젬-30, 한국상역 스폿라이트 1, 동양나이론 하이콤-8, 금성의 금성패미콤이 결과적인 산출물이었고, 전국 90개 상업고등학교와 10개 직업훈련원, 17개 공무원 교육에 배분됐다. 그러나 과기처는 보급이 완료된 8월 이후 단 한차례도 보완책이나 추가 지원책을 발표하지 않았고, 이것으로 끝이었다.

다만 '제1회 전국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를 개최하며 새로운 면모를 보여 나간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해마다 위축된다. 나중에는 후원기관이 바뀌면서 본래 명칭조차 사라졌다. 행사비용이나 고가 장비를 모두 기업체 부담으로 돌리면서 폐단이 발생했고, 참가자들은 참가 의의를 느끼지 못해 숫자는 해마다 줄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1984년 3월에 개최된 제 1회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 출처 조선일보 1984년 3월 28일자>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1 이달에 읽은
무료 콘텐츠의 수

월 1만1,000원으로 주요 산업별 시장 정보를 볼 수 있어요

구독하시면 모든 글을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
닫기

Shop 상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