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38)- '호환 PC 제조업체들의 전성기'
1980년대 들어 개인용 컴퓨터는 국내외적으로 각광을 받으며 다양한 용도에서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애플이나 탠디, IBM, 오스본, 쿠퍼티노 등이 대표적 회사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독자적인 플랫폼에 기반해 설계된 것들이어서 타기종 소프트웨어와 호환되지 않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이와는 또다른 축을 형성한 것이 호환기 생산업체들이었다. 독자 개발능력 없이 IBM이나 애플같이 당대 유력 제품을 복제 생산하는 것이었다.
국내서도 많은 기업들이 국산 컴퓨터 제조에 뛰어들었다. 물론 대규모 개발비 투자와 기반기술이 요구되는 독자기종보다는 호환기종이 다수를 이루었다. 특히 호환기종 가운데서도 장래성과 채산성을 놓고 저울질하던 대상은 크게 국산 교육용 컴퓨터 계열과 애플컴퓨터의 애플II 계열, IBM의 IBM PC/XT 계열,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와 일본 아스키사가 규격을 공동 설계한 MSX 등 네가지로 압축된다.
과기처는 PC보급 확대 차원에서 삼성전자와 금성사, 동양나이론(효성컴퓨터), 한국상역(한국컴퓨터), 삼보컴퓨터 등 5개사를 지정, 교육용 PC를 1천대씩 모두 5천대를 생산해 전국 상·공고에 배정한 바 있다. 하지만 회사마다 하드웨어 규격이 제각각이었고, 70년대 마이크로 컴퓨터 개념을 도입한 것이어서 굳이 호환 PC라고 하기에도 부적합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용 PC가 업계의 저울질 대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 계획 자체가 국책 프로젝트였던 만큼 사업성이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83년 호황을 누리던 교육용 PC는 84년을 지나 85년 상반기까지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한다. 83년 한해를 보내면서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 문제점이 새로운 구매자들을 주춤하게 한 것이다.
일반 수요가 줄어들자 업체들은 자연 문교부를 통한 상·공고 컴퓨터 공급에 눈독을 들이게 됐고, 5개 업체에 들지 못한 업체들은 5개 업체의 독점 납품 규제를 풀어들라고 각 기관에 진정을 하기도 했다. 5개 업체의 제한이 다소 풀리면서 84년에는 줄어든 수요에 늘어난 업체들의 과당경쟁이 시작됐다. 교육기관의 입찰 역시 최저가 입찰이고 보니, 업체마다 가격인하가 곧바로 판매로 연결돼 가격인하 경쟁은 불가피했다. 결국은 판매량이 적자액과 비례하는 등 자기무덤 자기가 판 격이 되면서 하나 둘 생산을 중단하는 업체들이 생기게 된다. 이로써 교육용 PC가 실패하기는 했지만, 80년대 중반 호환PC의 일부로 중요한 기류를 형성했던 것은 분명하다.
70년대 말부터 애플신화를 창조한 애플컴퓨터의 '애플II' 계열은 초창기 국내에서 삼보컴퓨터 등 전문업체들이 가세하기는 했지만 청계천 세운상가 중심의 중소기업 위주로 생산, 보급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애플II 계열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설계 개념이 적용된 데다 광범위한 시장조사에 근거해 초심자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제작됐다는 점이다. DOS 운영체제와 모토로라 6800같은 최신식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택하고 있고, 128Kbyte RAM을 기본장착해 최대 560*192 해상도 그래픽까지 지원하는등 교육용 PC보다 2~3년은 족히 앞섰다는 평을 얻었다.
IBM이 애플II에 자극받아 발표한 것이 'IBM PC 5150'이고, 이를 16bit로 업그레이드한 것이 IBM PC/XT로 82년의 일이다. IBM PC/XT는 8비트였던 애플II보다 한 차원 상위 기종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PC-DOS(MS-DOS)와 인텔 80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탑재했다. 호환성과 확장성이 뛰어나다는 평이 높았던 IBM PC/XT가 상한가를 올리면서 컴팩이나 델같은 호환기 제조업체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국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84년 이후 'IBM PC Compatible', 'IBM PC와 완전호환', '~는 IBM 호환기종이 아닌 IBM PC와 100% 동일한 제품'이라는 선전문구가 끊임없는 화제거리로 대두됐다. 84년 한 해만 10여개사가 IBM PC/XT 호환기종을 내놓았는데, 청계천 군소업체까지 포함하면 20여개사는 족했다. 이중 일부는 16bit IBM PC 호환기종을 단일 취급 품목으로 하는 곳도 있을 정도였다.
대표적인 관심 업체는 금성반도체와 금성사, 대우전자, 동양나이론, 동양정밀공업, 로얄컴퓨터, 삼보컴퓨터, 삼성전자, 선화컴퓨터, 에이스전자산업, 컴퓨터시스템, 컴퓨터코리아, 한국상역, 현대전자 등이었다. 이 가운데 83년 설립, 첫 해부터 호환기종 사업에 적극 뛰어든 신생 기업인 현대전자는 당시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Hyundai Pony'의 명성을 PC에도 이용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았다. 지금은 현대전자에서 분사돼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는 상황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IBM PC/XT 호환기 사업은 대부분 미국을 비롯한 외국 IBM 호환기업체들과 기술제휴를 통해 이루어졌다. 기술제휴 형식을 취해 조립 생산하거나, 자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복사품을 제작하는 수준이었다. 주요 제휴관계는 현대전자-미시우스, 금성반도체-이탈리아 올리베티, 금성사-OSM, 삼보컴퓨터-PCPI, 동양나이론-노쓰스타, 삼성전자-컴팩, 대우전자-코로나, 에이스전자-콜럼비아 등이었다.
초기에 이들 업체들은 내수보다는 수출 시장에 주력했다. 84년 6월 금성사가 OSM에, 삼성전자가 컴팩에 첫 선적을 함으로써 16bit PC 수출이 이루어졌다. 이같은 OEM 수출에서 기술을 습득한 삼성전자가 SPC-3000을, 금성사가 GMC-6011 기종을 발표하는 등 대기업의 적극적인 내수 참여가 이 시장의 열기를 더해 주었다. 이외 삼보컴퓨터는 16bit OA용 퍼스널컴퓨터 트라이젬 88을 개발, 84년 9월부터 판매에 들어가고, 동양정밀은 텔레비디오 제품의 대량 수출 경험을 토대로 자체 개발품인 OP-COM을 발표했다.
결국 애플과 IBM의 경쟁 구도에서 중소기업은 애플II를, 전문업체와 대기업은 IBM 호환기종으로 손을 내미는 양대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같이 국내 PC산업이 두 갈래로 가닥을 잡혀질 즈음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MSX'였다.
MSX는 83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ASCII)의 제창에 의해 시작된 컴퓨터로, 일종의 공개된 PC였다. MSX-DOS의 조합으로 8비트 CPU인 Z-80을 사용하는 시스템이면 어디건 사용될 수 있었다. 표준규격은 본체와 키보드, 화면, 주변장치 인터페이스로 구성됐는데 단지 MSX가 기존 PC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소프트웨어 호환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다는 점이었다. 이는 생산회사는 달라도 하드웨어 규격만 준수하면 어떤 하드웨어 기종에서건 소프트웨어가 호환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만 해도 여러 기종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려면 각 기종에 맞게 변경하거나 각 기종에 대해 별도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했다. 소프트웨어 개발비용과 개발시간이 많이 들고, 사용범위가 제한되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할 수 없던 소프트웨어 업체들로서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둘째는 MS와 아스키가 MSX 규격에 대한 권리를 갖지 않고 업계에 공개했다는 점이다. 양사가 하드웨어 업체가 아니었던 만큼 어느 기종에서나 실행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공급하려던 것이 양사의 원래 목표였던 셈이다. MS는 이미 IBM PC용으로 베이직이나 코볼 등을 이미 MSX 버전으로 수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이에따라 MSX는 발표 3개월만에 미국과 일본에서 50여개 하드웨어 업체가 제품을 생산, 발표했을 정도로 빠르게 침투됐다. 국내서도 83년 11월 금성과 삼성, 대우 3개사가 개발에 참여했다. 특히 대우전자는 안경수(한국후지쯔 대표)를 본부장으로 영입하면서 컴퓨터사업부를 전격 신설, 행보에 적극적이었다.
이들 3사에 MSX의 결정적인 연결고리를 제공한 곳이 큐닉스였다. 큐닉스의 이범천 사장은 83년 9월 마이크로소프트와 기술제휴를 맺고 MSX를 국내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MSX는 저렴하면서도 편리한 컴퓨팅 환경을 제공할 것이고,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제작되고 대량생산 체제만 갖춰진다면 해외 수출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범천 사장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큐닉스는 수입국의 문화적 차원에 맞게 각색한 인터내셔널 비전을 개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초 긍정론과 비관론이 팽배히 맞서 있던 금성과 삼성, 대우 3사의 MSX 국내 생산에 대한 견해는 이같은 이범천 사장의 노력으로 11월 최종 결정에 도달했고, 4개월 후인 84년 3월부터 완제품이 생산되기에 이른다. MSX는 IBM 호환PC 시장을 주춤하게 하는 등 국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88년 체신부의 제2차 교육용 PC 기종에 IBM 호환 PC가 최종 낙점되면서 MSX는 이후 자취를 감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