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2)- '화마로 사라진 국산 컴퓨터'
한국 컴퓨터사의 뿌리가 이 땅에 근원을 두고 있던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은 미천하고, 제조능력이 없었던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컴퓨터를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1960년대 남미나 북미, 호주 등으로 이민의 길을 떠날 때 컴퓨터는 거꾸로 이 땅에 이민온 것이다. 컴퓨터 생산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고 보면 자생력을 키우기란 처음부터 지나친 욕심이었을지 모른다. 어쨌건 우리의 컴퓨터 역사는 컴퓨터 제조의 역사, 컴퓨터 발달의 역사가 아니라 컴퓨터 도입, 즉 활용의 역사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외산 위주의 역사로 점철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기술로 컴퓨터를 제조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비록 아날로그 컴퓨터였지만, 국내 최초의 컴퓨터로서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됐다는 것은 컴퓨터 역사에 일획을 긋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컴퓨터 국산화의 쾌거는 당시 한양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이만영 박사에 의해 점화됐다. 대학에서 학습기자재로 고가의 하드웨어 장비를 구매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 교수로서 학생에게 검증된 결과를 보여주고 싶다는 열의에서 계속되는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전자계산기 개발에 뛰어든 것이었다.
한동안 미국 보잉사 연구원으로 근무한 바 있는 이만영 박사는 1962년 8월 진공관을 조립, 제1호 소형 전자계산기를 제작해 국내 최초로 가동에 성공했다. 곧이어 1963년 3월에는 설계를 개조하여 제2호 대형 전자계산기를 제작 완료했다. 이들이 국산 기술로 개발된 컴퓨터의 효시로, 실제 수업 과정에서 활용돼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한국 최초의 전자계산기 완성'이라며 이 역사적 쾌거를 대서특필하는 등 각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첫 국산 컴퓨터라는 영예의 순간도 잠깐, 63년 11월 30일 새벽 한양대 본관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본관 3층 이만영 박사 연구실에 있던 이들 컴퓨터는 안타깝게도 쓸모없는 고철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바깥으로 나올 차비를 차리고 있던 컴퓨터가 채 역사적인 기념비를 세우기도 전에 사라진 것이다.
이후 이만영은 5개월간 심혈을 기울여 국내 최대규모인 제3호 전자계산기를 완료한다. 현재 한양대 박물관에 전시돼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계산기로 회자되고 있는 컴퓨터는 화재 후 1963년 12월 10일부터 제작에 착수, 1964년 5월 7일 조립완료된 제3호기이다.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야 말았지만 이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는 당시 몇 기관에서 사용중인 아날로그 전자계산기에 비해 용량이 최대였다. 조립에 사용된 진공관만도 610여개에 이르고, 부속품은 총 4만개나 됐다. 정부에서도 정보산업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은 물론이고 투자여력이 없던 당시, 이만영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전자 부속품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돌아 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박사는 '가장 큰 애로사항은 부속품을 입수하는 일이었다. 국내에 있는 것이라곤 전선이 전부였다. 낮에는 미군부대 전자부품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모조리 뒤지고, 밤에는 부속품을 조립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며 그 시절을 회고했다.
학생들에게 자동제어공학 방정식을 파일로 입출력하는 것을 검증해 보이려는 취지에서 개발된 이 '전자관식 고속 아날로그 계산기'는 연립대수식, 선형·비선형 미분 방정식, 편미분 방정식을 자동 계산할 수 있었다. 때문에 어떤 물제의 움직이는 진동 상태를 재는 것에서부터 자동제어계, 항공력하계, 통신계, 음향계 등 다방면에 걸쳐 활용이 기대됐다. 또 급진적으로 발전되고 있던 국내 공업기술과 고도의 이공학 연구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수학적인 문제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한 상품으로서도 충분히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컴퓨터가 당시 사회환경에서 받아들여지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국내 과학기술이 정밀계산을 요하는 항공기나 유도탄같은 고도의 기계를 제작할 정도로 발전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탓에 이런 전자계산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결국 상품화에는 실패했던 것이다. 뒤이어 불어닥친 IBM과 스페리같은 상업용 디지털 컴퓨터 시대가 도래한 것도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하는 이유로 작용했다.
이후 이 박사가 1964년 미국으로 떠나면 국내 컴퓨터 개발은 명맥이 끊기게 된다. '10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나를 반긴 것은 한양대 박물관의 먼지 쌓인 3호 계산기였다'는 이 박사의 술회는 컴퓨터 개발의 맥이 끈긴데 대한 아쉬움의 토로였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성립되지 않지만, 아날로그 컴퓨터 보급이 활발해져 과학기술 분야에 왕성하게 활용됐다면 국내 컴퓨터 산업은 지금보다는 훨씬 발전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만영과 같은 젊고 유능한 과학자들을 절망케 하지 않았을 것임은 물론이다.
이만영의 컴퓨터가 빛을 발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부 차원에서 이같은 노력을 평가해줄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못했던 것도 상당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컴퓨터는 커녕 과학기술 전반에 관한 정부 차원의 정책이나 계획이 전무한 상태였던 것이다. 한국 컴퓨터 역사의 산증이었던 이만영 박사는 1924년에 태어났으며, 서울 공대 출신으로 미국 콜로라도대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 전자통신공학과 교수, 부총장, 경희대 초대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이만영 박사는 2013년에 별세했다.
*사진설명: 1964년 완료된 국산 3호기 아날로그 계산기. 국내에서 개발된 첫 전자계산기지만 연구용이나 강의 실습기자재 이외 상업용으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앞에는 이만영 박사, 사진 출처는 한양대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