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3)- '국내 컴퓨터 원조 PCS'
국내에 첫 발을 들인 '전자계산조직 도입 1호'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경제기획원의 IBM 1401이 후지쯔의 파콤 222(FACOM 222)를 앞서 시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959년과 1961년에 개발된 IBM 1401과 후지쯔의 FACOM 222는 트랜지스터를 주기억장치로 사용하는 2세대 컴퓨터에 해당한다.
그러나 PCS(Punch Card System)를 단순한 통계기구가 아니라, 컴퓨터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우리나라 컴퓨터사의 태동은 PCS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내에는 IBM 1401이 경제기획원에 도입되기 이전까지 PCS가 인구 센서스를 비롯한 각종 통계업무 처리에 사용돼 왔다.
실제로 경제기획원 통계국이 IBM 1401을 도입한 목적이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PCS의 계산속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당시 신문기사나 관련 자료를 보면 김학렬 차관을 비롯한 기획원 관계자들은 IBM 1401 기종을 기존에 사용해 오던 PCS보다 단지 한 단계 위의 기계쯤으로 여긴 것이 유력해 보인다. IBM 1401의 이용 시한도 S/370이 도입될 때까지로 한시적인 기간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 1967년 당시 통계국 키펀치실 책임자였던 성기수 박사 회갑기념집에서 '그 당시 나는 최초의 컴퓨터 시스템(PCS, IBM 1401)을 이용하여 인구센서스 통계처리를 하던'으로 회고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일부 학자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1961년 3월 내무부 통계국(경제기획부 통계국의 전신)이 도입한 IBM의 PCS를 국내 도입된 최초의 컴퓨터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기획원 관계자들이 PCS와 IBM 1401을 기계 자체의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계열선상이라는 인식이 컴퓨터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PCS는 우리나라 컴퓨터 도입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기획원이 도입한 IBM 1401은 IBM 한국지사에서 월세 9천달러의 사용료를 내고 임대한 것으로, 시가가 40만달러에 달했다. 사용료만도 당시 5급 공무원 5백명의 봉급에 해당하는 액수다. 당시 언론에서는 IBM 1401에 대해 '66년 인구조사의 경우 통계국 4백50명이 14년 6개월에 걸쳐 작업해야 하는 것을 1년 6개월에 해결할 수 있다. 비용도 수작업으로 2억1천만원이 소요되는데, 이 기계를 쓰면 9천만원으로 줄어든다'고 적고 있으니, 당시 이 컴퓨터가 우리나라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PCS가 세계 컴퓨터사에서 ENIAC의 탄생에 내적, 외적으로 영향을 미쳤듯 통계국의 PCS도 이 땅의 컴퓨터 도입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자계산조직 도입이란 단순한 계산속도 향상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선진기술과 첨단기기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욱이 경영조직 체계 변화와 생산성 향상의 동인으로도 인식되는, 즉 새시대 새물결의 기수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PCS는 당시의 정부나 일반인에게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수작업으로만 이루어졌던 자료 처리에 PCS가 투입됨으로써 능률 향상은 물론, 이후 IBM 1401 도입에 촉매역할을 톡톡이 한 것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통계국 PCS는 1960년 12월 실시된 국세조사 간이 센서스와 1962년 2월 실시 예정이던 농업 센서스를 처리하기 위해 1961년 3월 PCS 1백30대가 AID 자금으로 도입됐다.
이 시기 경제기획원 외에 PCS를 사용한 곳은 미8군과 보사부 통계국이 있었다. 미군은 보급물자를 처리하기 위해, 그리고 보사부는 보건 통계자료 처리를 목적으로 각각 1958년과 59년에 구입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데이터 프로세싱이란 개념이 시스템 차원에서 도입된 것은 60년 내무부 통계국이었다. 60년 국세조사 간이센서스를 할 때 USOM 원조로 고문단이 파견됐는데, 이 때 외국 데이터 프로세싱 전문가들이 처음 사용하며 국내 소개된 것이다. 이후 내무부 통계국 직원인 이규설, 한필봉, 이지상, 최부일, 김봉한 등 26명이 일본 요꼬하마에서 IBM PCS 교육을 받고 돌아오면서 데이터 프로세싱이란 용어가 사용되는 본격적인 계기가 마련된다.
당시 이들이 받은 교육은 우리나라 최초의 PCS 교육으로, 한국에서 영업활동을 벌이던 IBM이 PCS 판매를 위해 일본IBM에 위탁한 것이었다. 이 교육을 시발로 하여 내무부 통계국엔 PCS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