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5)- '외국 컴퓨터 회사들의 국내 시장 진출'

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5)- '외국 컴퓨터 회사들의 국내 시장 진출'

KRG

1960년대 후반 IBM에 이어 후지쯔와 CDC가 국내 들어오며 한국 컴퓨터사는 새로운 장을 열어 나간다.

국내 컴퓨터 역사에서 이들 외국 컴퓨터 회사들은 큰 역할을 차지한다. 컴퓨터가 원래 외국에서 들여온 제품인데다, 세계 컴퓨터역사 역시 이들 메이커의 기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시장 지배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경제기획원에 IBM 1401이 설치된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설립된 IBM KOREA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내 진출한 외국 컴퓨터 판매 및 용역회사로 기록돼 있다. IBM의 한국시장 진출은 당시 배경과 밀접한 관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시스템/360'의 인기가 절정에 달할 때 IBM은 경제기획원에 발표된지 8년이나 지난 구형 2세대 컴퓨터를 공급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하나는 당초 경제기획원이 구매하려던 S/360이 인도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IBM 1401을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입 즉시 컴퓨터 활용에 수반되는 인력교육과 AS를 위해 IBM 한국법인을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이에따라 IBM은 67년 4월 25일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840호 15평 남짓한 크기에 지사를 설립하고 영업활동에 들어갔다. 시설 역시 사무용 책상 두 개, 손님 접대용 소파 하나가 고작이었다. 창설 멤버는 루이스 스탠드라는 미국인 사장 이외 미8군 프로그래머 출신의 김영수, 이정희 등과 미8군 PCS 기술요원 손용호와 오영전, 윤영훈, 정우진 등 IBM 한국지사 소속 요원 6~7명이었다.

IBM은 IBM코리아가 IBM의 전액 투자로 지사가 출범되기 전인 1950년대 말부터 주한 미8군 영내에 한국인 직원을 상주시켜 시스템 교육 및 유지보수를 담당해 왔다. 국내는 컴퓨터 한대 없던 1960년대 중반까지 미8군은 대구 컴퓨터센터에 IBM 7010과 IBM 1460 두대, 부평 보급창에 IBM 1460, 용산사령부에 IBM 1130 등 4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1960년대 초반 서울에 연락사무실겸 영업사무실 역할을 하는 비법인 형태의 지사를 두게 된다. 경제기획원이 1961년 3월 국세조사 간이 센서스와 농업 센서스 처리를 위해 PCS를 들여온 것이 계기였다. IBM 한국지사는 미국 본사의 지시로 통계국 직원 26명을 일본 IBM사에 파견, PCS 위탁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 미8군에 PCS를 보급하는 등 단순 영업활동도 수행했다.

당시 조사통계국 직원으로서 IBM 한국지사에 의해 일본에서 PCS 교육을 받고 국내 정보산업 개척자로 공을 세우는 이들이 이지상(전 한국소프트웨어서비스 대표, 작고), 한필봉, 김동희(전 동양시스템하우스 대표) 등이다.

IBM코리아는 같은해 6월 사무실을 서울 서소문 삼령빌딩으로 옮기고 조완해(한국유니시스 사장), 김성중(전 기흥정보시스템 대표) 등 신입사원을 채용하며 창업 첫해 직원을 24명으로 늘렸다. 71년까지 IBM코리아는 오창규(IBM 아태지역사업총괄본부장), 서치영, 김형회 등이 입사하며 87명으로 증원된데 이어 한국시장 점유율을 65%까지 끌어올리는 등 독보적인 존재로 부상하게 된다.

IBM코리아 출범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외국기업 투자유치 방침에 따라 컨트롤데이터, 한국유니백, 스페리랜드(유니시스로 합병) 등이 직접 또는 합작 형태로 한국에 법인을 설립했다. 또 일본 후지쯔와 미국 NCR, 버로스(유니시스로 합병)같은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들도 대리점 형태로 국내 진출한다.

67년 9월에는 CDC가 50만달러를 투자하며 외국인 업체로는 두 번째로 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를 설립했다. KIST 전산실의 CDC 3300 도입을 계기로 설립된 CDK는 CDC 소속의 민병래(전 CDK 사장),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의 이규설(한국전자사무기 대표)과 이지상, 미8군 소속의 이덕순 등이 초기 핵심인물이었다.

미국 플랜클럽사와 동양물산이 8대 2로 투자해 설립된 한국유니백은 당시 IBM에 이어 시장 점유율 2위를 달리던 스페리랜드(SPERY Land)의 유니백 시리즈를 국내에 직접 공급했다. 보사부 국립보건연구원의 유니백 1005 도입을 계기로 68년 10월 출범했다. 창설 멤버는 이후 스페리랜드코리아의 사장을 지낸 해리화성 김을 비롯, 경제기획원 소속의 한용석과 이달호, 생산성본부의 육종국 등이었다. 한국은 컴퓨터 판매 및 고객 서비스를 책임지고, 미국은 기술지원을 담당하는 형태로 이원화했던 한국유니백은 대정부관계 컴퓨터 영업에 타메이커보다 우위를 차지하며 착실한 성장의 길을 밟아왔다. 하지만 국내 유니백 기종이 대거 보급됨에 따라 지원이 한계에 부딪혔다. 한국인 요원으로는 기계설비가 불충분하고 AS를 원만히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미국 유니백이 바로 한국에 진출하게 되고, 71년 3월 스페리랜드 코리아(스페리)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한국유니백은 강병구, 이달호, 윤지원 등 몇 사람만 남은채 스페리에 직원 대다수를 인계하고 판매 전문회사로 탈바꿈한다.

생산성본부에 파콤 기종을 설치하며 국내 진출을 노리던 후지쯔는 한동안 본사에서 직접 컴퓨터를 판매했을뿐 회사설립의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한양대와 농촌진흥청, 국립건설연구소에 파콤 230-10을 설치했으나, 이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도입된 것들이었다. 이후 육사와 생산성본부에 기계를 설치하면서 서울 주재 사무소에서 시장조사나 AS를 실시하는데 그쳤다. 이후 1972년 12월 중앙교육연구원에 파콤-Mate 기증을 계기로 파콤 컴퓨터 교육을 일으키기 시작한 후지쯔는 포항제철에 컴퓨터를 설치하면서 회사 설립의 기회를 잡게 된다. 74년 2월 吉川一郞, 황칠봉 등 20명의 인원으로 파콤 코리아가 탄생한다. 생산성본부에서 파콤 기종을 도입할 당시부터 대일관계 감정이 좋지 않았던 터라 파콤 설립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NCR은 67년 1월 동아무역과 대리점 계약을 통해 한국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 때는 사무자동화 제품인 금전등록기나 회계기 등이었으며, 컴퓨터 판매는 없었다. 한일은행과 외환은행에 NCR C-500과 NCR C-100을 설치하면서 NCR 기종을 선보인 동아무역은 이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민간 온라인 실시에 힘을 쏟는등 업무활동을 계속해 나간다. 동아무역은 이후 1975년 11월 NCR의 국내판매 및 지원을 위해 동아컴퓨터를 출범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 걸친 외국 메이커들의 국내 상륙은 우리 컴퓨터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컴퓨터 판매에 따른 일반인의 인식과 계몽에 기여한 것은 물론, 기술보급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등 컴퓨터 활용에 대한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사진 설명: IBM의 한국 시장 진출에 대한 경향신문 1968년 7월 27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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