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6)- '1960년대 사무자동화 열풍'
1960년대말 컴퓨터 도입에 도화선을 제공한 것은 사무처리 능률 향상을 위한 사무자동화였다. 일각에서 사무자동화에 편승한 컴퓨터 활용이 차츰 표면화되는 계기를 만들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력이 풍부하고 값싼 임금의 수작업이 만연해 있던 시기 일이 밀리거나 시급한 경우에는 인해전술로 해치워도 됐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사무자동화에 눈떴다는 것은 경영 혁신이나 업무처리의 구습을 타파하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 컴퓨터가 업무 능률을 향상시키는 사무자동화 기계의 일부분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업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시초인 셈이다.
초기 사무자동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외부적 요인의 한가지로는 1968년 9월 1일 국내에서 처음 개최된 '제1회 국제사무기계화촉진전시회'였다. 전자공업진흥에 활력을 불어넣은 1968년 'IEEE쇼'도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정부와 경제단체의 지원 아래 한국생산성본부는 1968년 9월 1일부터 8일까지 시민회관 옆 특별전시장과 예총회관전시장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생산성본부의 창립 11주년 기념을 위해 마련된 전시회에는 미국과 영국, 서독, 일본,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8개국 사무기계 메이커 47개사가 참가했다. 선진국은 사무자동화에 의해 이미 경영정보를 신속하게 처리함으로써 업무효율을 도모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때였던 것이다. 전시된 물품 가운데 전자계산기 분야로는 파콤 230-10과 버로스 E4000이라는 전자식 회계기 등 2종목이었다. 이외 전동 및 수동가산기, 수동계산기, 전동계산기 등이 출품됐다.
이 전시회를 통해 정부 및 재계, 산업계에 사무관리 합리화 무드가 조성됨으로써 사무의 질적향상과 원가관리 의식이 미력하나마 고취될 수 있었다. 훗날 경영의 고도화와 경영정보처리시대로의 길을 터놓았던 셈이다.
당시 생산성본부가 표본추출법에 의해 조사한 사무기계 보급현황에 따르면 가장 보편화된 타자기는 1회사당 평균 2.2대, 복사기 0.8대, 탁상전자계산기 0.1대에 불과했다. 회계기는 금융기관이 한두대씩 보유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국제사무자동화촉진전시회가 개최될 무렵에는 기업 사무자동화에 앞장섰던 전동식 회계기가 전자식으로 대체되는가 하면 실제로 이런 변화의 흐름을 타고 컴퓨터가 일반에게 부지불식간에 침투하고 있었다.
기업으로서 사무자동화에 먼저 눈뜬 곳이 은행권이었다. 은행 사무자동화는 일제시대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들어온 회계기가 그 효시였다. 이전에 락희그룹(현 LG그룹)과 유한양행이 먼저 시도하여 원가절감과 능률향상에 큰 효과를 보고 있었지만, 유한양행은 컴퓨터 운영이 실패하며 타기관의 모델 케이스로는 실효성을 잃었다.
새시대의 새은행이란 이미지를 고객에게 부각시키며 1967년 1월 설립된 외환은행은 설립 초부터 사무개선과를 발족하는 등 타은행보다 사무기계 활용면에서 앞서 나갔다. 국내에서는 처음 특수자기원장(NCR 395의 보조기억장치)을 사용해서 당좌예금의 입출금 사무를 처리했고, 소형전자계산기를 이용해 급여를 계산하며 기계화 무드를 조성해 갔다. 설립시부터 구성된 사무자동화위원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70년 1월에는 은행으로는 처음 컴퓨터를 도입, 3월부터 가동에 들어가는 신기원을 이룩했다. 외환은행이 사무자동화에 앞장설 수 있었던 이유는 국내 최초의 외환 전문은행의 면모를 살리려는 의지도 있었지만, 관리자들의 관심이 지대했고 의욕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욕은 이후 1972년 국내 최초의 온라인화에서 진면목이 드러나게 된다.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역시 사무자동화 준비를 착실히 다지면서 신속한 사무처리, 원가절감, 경영 합리화에 앞장서 나간다. 컴퓨터를 도입하기 전인 1968년 한국전자계산소에 적금업무 및 급여업무 용역을 맡긴 상업은행은 컴퓨터 도입에 대한 사전준비의 일환으로 1969년 4월 EDPS 도입을 위해 사무부가 설치되고, 7월부터는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68년 11월 유니백 9400 기종을 선택, 발주한 상업은행은 20여명을 한국유니백에서 교육받게 했다. 그러나 유니백 9400은 상업은행에는 도입되지 않고 금융기관 전자계산본부(KBCC)에 들어가게 된다. 상업은행은 KBCC 탄생의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며, 이는 또한 국내 최초로 컴퓨터 공동이용이라는 과도기적 컴퓨터 활용 형태를 취하게 한 모태가 됐다.
경제기획원 통계국을 효시로 국영기업체나 국가기관으로서 사무자동화에 앞장선 곳은 국세청과 철도청,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전력 등이다. 한국전력이 전자계산기를 설치, 가동한 것은 71년 7월. 그러나 컴퓨터 도입까지엔 4년여의 준비기간이 있었고, 이전에 한전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전자회계기 10대(NCR 395와 버로스 E1000)를 미국과 일본에서 도입했다. 성동영업소에 전자회계기사무소를 설치, 운용하면서 서울시내 관내 24만여호의 요금사정 및 조정업무를 처리했다. 보조기억장치로 원장에 마그네틱 스트라이프를 사용한 이 전자회계기는 최종 데이터만 기억시키는 콘솔과 프로세서로만 구성돼 있었다. 단순히 한번에 치고 찍어내는 기계였다.
한국전력은 컴퓨터 도입의 사전 작업으로 1967년 10월 16일 경영기계위원회를 설치, EDPS 도입연구 및 대상업무 조사분석에 들어갔다. 이어 1970년 6월 17일 IBM 360-40을 선정, 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7월 전자계산소를 발족하고 가동에 들어갔다. 초기 한전업무를 기계화하는데 있어 당시 계통계획과장으로 근무했던 송길영(고려대 교수 역임)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사무자동화가 컴퓨터 도입을 추진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시대 조류에 편승한 자연스런 추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자동화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개별사무의 합리화, 기계화를 위해 수동식 계산기를 이용하거나 타자기, 복사기 등의 기초 사무기계를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은 불편요인을 내포한채 컴퓨터 산업의 기반구축에 주력한 전대미문의 시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사진설명: 1968년 9월 2일 개최된 국제사무기계화촉진전시회 홍보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