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콤퓨타 산업 100대 이야기(10)- '정부기관들의 전산화 열풍'
1970년 경제기획원 예산국이 KIST 전산실의 CDC-3300과 터미널을 연결, 예산의 EDPS화를 시행하는 때를 전후해 각 정부기관에서는 앞다투어 컴퓨터 도입을 계획하게 된다. 행정의 효율화, 과학화라는 기치 아래 도입된 컴퓨터가 각 부서 업무에 활력소를 제공하고 행정의 현대화 과정에 긴요한 수단으로 여겨진 것이다.
경제기획원 예산국이 컴퓨터 혁명의 기수로 등장한 것은 어찌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보수적인 관료 가운데서도 가장 보수적인 예산국이 현대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를 앞서서 이용했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이것은 개혁의 물결을 탈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요구가 강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예산편성때만 되면 직원들은 밤을 새워가며 숫자를 정리해야 했고, 결산은 집계가 늦어 항상 전년도의 낡은 숫자를 상대로 해야만 했던 예산국은 예산 정책의 효율화를 개선하기에 앞서 주판알을 튕겨야 하는 계산국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특별회계까지 합쳐 당시 7천여억원이 들어오고 나가는 살림살이는 엉성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각 부처의 요구액과 예산국의 산정액을 합쳐서 양분하고, 타협적으로 예산을 결정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런 주먹구구식 예산 정책을 타파하고 효율적인 예산관리를 위해 등장한 것이 컴퓨터였다.
예산업무에 컴퓨터를 도입하려던 배경에는 당시 미국의 선례가 크게 작용했다. 1965년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이 컴퓨터에서 처리된 결과를 들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육해공군이 요구한 국방비를 20%나 깎아버렸다는 뉴스는 컴퓨터가 단순히 주판 이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 것이었다. 이에따라 예산국은 1968년부터 예산 컴퓨터화를 위한 기초작업에 들어가 예산국 직원 가운데 컴퓨터 요원을 선발, 과학기술처를 통해 연수를 시켰다. 결국 여러 시행착오를 되풀이한 끝에 70년 6월 당시 국내 최대의 CDC-3300에 터미널을 연결, 예산국 안에 설치한 것이다.
한편 예산의 EDPS화가 계획될 무렵, 그러니까 정부기관이 컴퓨터 도입채비를 정책적인 의지로 구체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던 때 첫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 국세청과 철도청이었다. 말하자면 국세청과 철도청을 시발로 종합적이고 정책적인 국가 행정의 전산화가 실제적인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경제개발을 위한 내자수요를 합리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66년 3월 신설된 국세청은 세무행정의 기틀을 마련하자 마자 국세청의 과학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첫 단계가 68년 5월 기획실내에 신설한 EDPS 전담반으로, 미국 및 일본 국세청의 EDPS 과정 및 현황을 연구하면서 컴퓨터 도입 준비작업을 서두르게 된다. 또 최부일을 주축으로 김동석, 김수경, 성희안 등으로 구성된 EDPS 전담반 기능 강화를 위해 이들을 CDC에 파견, 컴퓨터 교육을 받게 했다. 이들이 CDC에서 프로그램 기술교육을 6개월간 받고 돌아옴과 동시에 국세청은 요원 확보를 위해 전국 세무관서 공무원중에서 희망요원을 공개 선발하기에 이른다. 컴퓨터에 대한 인식이 일천한 당시에는 컴퓨터가 공무원의 보수성과 현상 집착의 태도를 무너뜨릴 만큼 널리 퍼져 있지 못한 상태로 희망 공무원도 별로 없었다.
국세청은 이후 과기처 산하 EDPS 도입심의회 승인을 얻어 69년 7월 콘트롤데이타코리아와 CDC 3150 시스템 도입에 관한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고 1970년 12월 도입, 다음해 1월부터 정상가동에 들어갔다. 첫 전산화 업무는 세무담당분석, 법인세 신고사항 분석, 각종 통계처리 등이었다. 72년부터는 원래의 도입 목적인 세무행정 과학화의 근간을 이루는 징수업무 자동화에 들어가 그 첫단계 사업으로 과세자료 처리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종합소득세, 영업세부과와 고지서, 물품세표 작성업무 등을 전산화해 업무 전반에 대한 과학행정의 기틀을 다져가게 된다.
한편 국세청의 전산화 계획 수립과 거의 때를 같이해 정부기관의 컴퓨터 활용의지가 구체화된 곳은 철도청이었다. 당시 철도청이 업무를 전산화하게 된 것은 철도업무가 처한 특수성 때문이었다. 철도청은 자체 조직이 방대할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어 관리 방식이 매우 낙후돼 있었다. 또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고속버스와 대형 화물자동차의 출현으로 공로수송이 철도 이용자를 잠식하기 시작, 독점기업에서 경쟁기업으로 탈바꿈될 형편이었다. 아울러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마지막 단계에서 수출입에 따르는 물자 수송의 대량화, 복잡화, 경제의 대규모화 등이 철도 업무의 후진성에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이에따라 관리방식 후진성을 탈피하고 기업 경영방식 도입, 경영정보의 적기 획득, 정확한 재정형태 파악, 공로수송수단과 경쟁하기 위한 경영합리화와 철도경영 근대화를 위해 전산화를 통한 탈출구 모색에 들어가게 된다.
철도청이 컴퓨터를 도입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EDPS 도입 추진위원회와 EDPS 연구실을 설치한 것은 1968년이었다. 기관 직제와 관계없이 EDPS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든 EDPS 연구실 창설멤버로는 조우현, 남경락, 최태규(케이비씨 사장), 왕창종(인하대 교수) 등이었다. 여기서는 EDPS도입을 위한 기초작업으로 전담기구설치 준비작업, 요원 색출 및 훈련, 청내 PR, 1단계 업무 선정 및 타당성 조사들을 전담했다.
이런 예비작업 끝에 69년 7월 EDPS 전담기구인 전자계산담당관실이 기획관리관실 내에 설치된다. 과학기술처에서 실시하던 공무원 위탁교육으로 전자계산 전문과정(6개월)을 수료하는 한편 70년 2월 1단계 적용업무 선정 및 프로그램 개발을 착수하게 된다.
철도청이 유니백 9400을 도입한 것은 71년 9월이었다. 그러나 철도청은 컴퓨터를 도입, 자체적으로 업무를 전산처리하기 전에 이미 한국전자게산소에 업무를 용역 의뢰하여 전산화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화물 통보나 처리, 철도수입 분석, 처리, 배차, 조치 등에 관한 업무를 한국전자계산소에서 용역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런 기초 위에서 유니백 9400을 도입한 철도청은 여객이나 화물에 대한 운수통계, 운임심사, 운전 및 연료소비 통계 등을 전산화하면서 자동화된 철도행정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게 된다.
치안본부 역시 69년 10월 '감식계 전산반'이라는 이름으로 컴퓨터 활용의 기틀을 마련한다. 당시만해도 주먹구구식 수사가 성행하던 때라 과학수사의 첨병인 감식계는 한직으로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주민등록증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새로와지면서 차츰 컴퓨터 도입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지문을 통해 과학수사의 기틀을 다지려는 일환에서였다.
치안본부가 처음 시작한 업무는 IBM 029 키펀치 17대를 도입, 요원 34명을 선발해 주민등록 기록을 펀치하는 것이었다. 펀치에서 찍어낸 주민등록발급 카드를 테이프에 수록하기 위해 통계국에 있던 IBM 360-40을 이용해 1천7백만 인구에 대한 마스터파일을 완성하는 작업으로, 여기에는 전과기록만 2백50만건, 주민등록 인원 1천7백만, 수배기록 5만개가 포함됐다.
치안본부는 감식계 전산반을 72년 3월 전산실로 명칭을 개편하면서 본격적인 컴퓨터 도입 준비에 들어간다. 주민등록증을 취급하는 과정에서 컴퓨터에 눈을 뜨게 되고, 또 IBM으로부터 컴퓨터 교육을 받으면서 과학수사의 초석이 하나하나 놓여져 갔다.
당초 IBM 기종을 도입할 계획이던 치안본부는 계약까지 진행되던 단계에서 하루아침에 유니백 기종으로 바뀌는 이변을 낳는다. 다행히 유니백 9400이 IBM 360-40과 비슷해 별 무리없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컴퓨터 정치 바람'의 일면이 연출된 것이었다. 이로써 치안본부는 방대한 양의 수사기록을 조회, 과학 수사의 선봉장으로 앞장서 나가고, 급기야는 주민등록번호의 조회만으로 범죄자의 과거 구석구석까지 파헤치는 무서운 이기를 소유하게 된다.
초기 컴퓨터를 이용한 기관 가운데 정부기관이 차지한 비율은 70년 1월을 기준으로 거의 40%에 육박했다. 이는 총 컴퓨터 대수 5천9백대 가운데 정부기관이 1백85대로 3.1%에 불과하던 일본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들 정부기관이 컴퓨터 도입을 서두른 가장 큰 이유는 문명의 이기라는 컴퓨터를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늘어난 업무 팽창 때문이었다. 즉 경제개발에 따른 폭주하는 업무처리의 효율화, 행정의 과학화라는 물결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작용도 점차 늘어났다. 초기 컴퓨터 도입을 각 기관마다 무계획적으로 실행함으로써 오는 문제점들이었다.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포용해야 할 성질의 것이었지만 정책적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성 또한 강하게 요구됐다.
당시 주무부서인 과학기술처는 초기 정책의 유약한 상태에서 벗어나 직접 컴퓨터 활용의 장에 뛰어들게 되는데, 이 결실로 탄생한 것이 바로 중앙전자계산소(GCC)였다. 당시 초대 소장은 공학박사였던 송길영씨가 선임됐다.
<사진설명: 1970년 5월 11일 공공기관의 전산화 업무를 담당할 중앙전자계산소 설립. 초대 소장에 공학박사 송길영씨 선임>